갈루아의 반서재

​우치다 타츠루, <곤란한 성숙>


'노동'의 대립 개념

그것은 무엇인가를 정의하기 보다는 그것은 무엇이 아닌가를 통해 개념을 좁혀 나가는 것이 빠른 이해를 도울 때가 있다. 

유쾌하게 일하는 사람에게는 '온과 오프의 디지털적인 경계선' 따위는 없습니다. '온과 오프의 디지털적인 경계선'이 없는 삶의 방식이 '생물로서 살아가는 이치에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노동과 유희의 구별이 가지 않는 상태'가 이상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일부러 절단하여 '노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힘을 들일 필요는 없다.


노동의 기원

노동은 소비와 상관이 있다. 반대가 아니다. 소비량이 늘어나고 소비하는 품목이 늘어나면 그만큼 노동시간과 노동의 종류도 늘어난다. 간단한 이야기이다. 자연의 증여로 꾸려 나갈 수 있다면 인간은 노동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노동의 양과 질을 결정하는 것은 소비의 양과 질이다. '있는 것'을 주워 모으는 것만으로는 식생활의 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없기 때문에 노동을 시작한 것이다. 


경영자는 왜 자사 제품이 버려지기를 바라는가

노동이란 그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생산비용보다 관리 비용을 우선시하는 도착은 어제 오늘 시작한 이야기가 아니다. 몇 천명의 농부가 1년 내내 농사지은 것을 왕과 신하들이 하룻밤에 탕진하는 것이 노동의 본질이다. 피라미드를 세우거나 만리장성을 쌓거나 양자강와 황하를 잇는 운하를 파거나 전쟁을 하는 것이 노동의 본질이다. 

노동은 '안정적인 공급시스템의 건설'이 목적이며, 그 시스템을 타고 흘러가는 재화 자체의 질이나 양에는 부차적인 중요성 밖에는 없다.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불필요한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 노동의 본질에 가깝다. 

인류사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는 공정을 고도화하고 복잡화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는 공정의 관리'를 고도화하고 복잡화하는 과정이었다.


글로벌 기업은 '전투 집단'이 아니다

자신이 상처를 입으면 구성원 전체가 '상처를 입은' 것처럼 느낀다. 이 통증의 공유랄까, '공상성(covulnerability)'이 조직의 통합력과 전투력을 담보한다. 그런데 현재 일류급 회사, 특히 글로벌화하고 있는 기업은 '공상성'의 규칙을 보유하지 않는다. 그런 기업에서는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하면 대열이 전진하든 퇴각하든 부상자는 동료에게 버림을 당한다. 왜 이런 규칙이 채용되었을까. 이 게임의 진정한 주체는 사실상 전쟁터에 없기 때문이다. 

일을 하려거든 어디까지나 '부성원리', '남성원리', '공상성'의 규칙이 관통하는 집단을 선택해야 한다.


직업으로 가는 길은 무수하게 열려있다

'샐러리맨이 되는 길 말고는 무수한 직업이 있다'는 정보를 젊은이에게 알려 주는 것은 기업의 인사에 지극히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와 관련한 정보는 차단한다. 이는 국책이기도 하다.


결여가 있고, '나'는 그 후에 등장한다

어째서 '가능'의 조동사를 쓸 줄 아는 인간만이 '어른'으로 분류되는 것일까요?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은 개인을 향한다. 이에 반해 '할 수 있는 일'은 공공을 향한다. '개인적인 것'이란 한마디로 타인의 동의 또는 참여 없이 결정할 수 있다. 반면 '공공적인 것'이란 타인의 동의 또는 승인 없이 결정할 수는 없다. 

'당위'와 '원망'을 성립시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다. 당위가 지향하는 바는 '자기에 대한 기대를 스스로 달성하는 것'이다. 원망이 지향하는 바는 '자기의 욕망을 스스로 충족시키는 것'이다. 주어의 동작이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 이를 재귀적인 동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가능'은 그렇지 않다. '나는 이것을 할 수 있어요'라고 알리는 것은 '이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는 곳에서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가능'이란 타자의 기대를 내가 채울 때 이웃의 요구에 내가 응할 때만 의미가 있다.

먼저 '필요성'이 제시되고 나서 그 후 '가능'을 알리는 발화가 이루어진다. '가능'은 요청이 있은 다음에 비로소 주체가 된다. 자리가 먼저 주어지고, 거기에 대해 내가 반응하는 순서 안에서만 비로소 '가능' 조동사는 의미를 지닌다. 필요성이 없는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아무리 열거해봤자 별 소용없는 빈말이 될 뿐이다. 

'어른'이란 자기가 누군인지, 자기가 앞으로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지, 무엇을 해내개 될지를 '자기의 생각'이나 '혼잣말'의 형식이 아니라 '타인의 요청'에 바탕을 두고 '응답'하는 형식으로 언어화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가능'의 문장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몇몇 조건이 필요하다.

(1) 타자가 있을 것

(2) 그 타자가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고, 그것이 채워지기를 바라고 있을 것

(3) '당신의 결여를 충족시킬 사람, 바로 나입니다'라고 자기 존재를 밝힐 것


정직한 신체 만들기

'집착과 긍지'의 차이를 판단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신체 움직임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하는 것만이 판정의 기준이다. 하지만 그 차이를 판정하기 위해서는 생명력을 강화시키는 것에는 찰싹 달라붙고 생명력을 약화시키는 것에서는 몸을 틀어 도망가는 '정직한 신체'를 갖고 있어야 한다. 


노력할 수 있는 것도 운

'노력할 수 있는 것도 운'이다. 선천적인 자질이 있거나 후천적인 환경이 마련되어 있는 덕분에 노력할 수 있다. 노력이란 자기 결정이 가능한 일이 아니다. 자기 결정이 가능한 부분도 있지만 전체가 다 그렇지는 않다. 


곤란한 성숙
국내도서
저자 : 우치다 다쓰루 / 김경원(KimKyoungwon)역
출판 : 바다출판사 2017.01.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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