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중,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 '요점만 있는 짧은 시간'에는 아무래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나다움'의 표현
사람이 사회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얻거나 어떤 종류의 '나다움'을 표현하려 할 때 내가 원한다고 해서 전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타자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타자의 개입이 있으며 "그 일은 당신 없이는 안됩니다"라거나 "그 일은 당신에게 어울리는군요"와 같은 타자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승인을 얻지 못하고 타자에게 무시당하거나 인정받지 못하면, 사람은 존엄에 상처를 입고 무기력해집니다.
단지 입장권을 얻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상관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을 통해서 '나다움'도 표현하고자 하기 때문에 어려워지는 것이지요. 이는 많은 사람이 일을 구할 때 망설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너무 신중해지는 바람에 도리어 일을 얻을 기회를 놓치거나 결과적으로 '나다움'을 발휘하기 어려워지는 측면도 있는 거 같습니다.
물론 일이란 개인의 자기 정체성과 연관된 중요한 것이므로 쉽게 타협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에 너무 얽매인다면 사회로 들어가는 입장권조차 얻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자유로운 시대의 곤란
무언가를 극복하기 위한 에너지라는 면에서 볼 때, 어쩌면 장애물이 있는 편이 사람을 열심히 노력하게 하는 측면이 있지 않나 합니다. 다양한 장애와 족쇄가 있던 옛날이 어떻게 보면 정신적으로 편했던 것이지요. 예전에 비해 요즘은 이런 종류의 문제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자, 여러분 모두 자유롭게 자기 자신을 표현해보세요"라며 '되고 싶은 나'를 마음껏 추구하는 것으로 승부를 내라고 합니다. 그것이 자아실현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도망가지도, 변명하지도 못하는 몹시 괴로운 상황이 아닐까 합니다.
애초에 거의 차이가 없으니 개인이 아무리 노력한다고해도 다른 사람보다 훨씬 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넘버원'이 되기도 몹시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엽적인 부분에서 필사적으로 겨루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보자'며 욕심을 내게 되지요.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가치의 두 가지 선택지에 관해 성찰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자'라며 제한 없이 많은 것을 실현하려는 바람에 결국 그 욕심으로 스스로 망가지게 생겼습니다.
높은 이상을 갖는 것은 물론 좋은 일입니다. '향상심' 또한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 결국 자기 폐쇄적인 상태에 빠져버린다면 이상과 향상심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나니
인간의 비극은 '미래를 예측하고 싶어 한다'는 것과 '기억한다'는 것에서 기인합니다. 과거를 아쉬워하고 미래를 불안해하기에 마음의 병을 얻는다는 말이지요.
'때'가 기다려준다는 안심, 그것이 있기에 사람은 '지금, 여기'를 열심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약 '서두르지 않으면 늦는다' 거나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같은 초조함에 휩싸여 행동에 나선다면, 마음이 깃들지 않은 어중간한 상태로 일하게 되지 않나 싶습니다.
'쓸모없음'의 효용
'요점만 있는 짧은 시간'에는 아무래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쓸모없음이 줄어들고 경제적인 효율이 높아지는 측면은 있겠지요. 하지만 그 방향으로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틀림없이 사람은 소모되기만 하여 남는 것 하나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작지만 빛나는 일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은 그저 과거에 일어난 일이나 인물에 관한 지식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의 본질은 현대에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역사란 현대라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질문을 통해 비로소 알 가치가 있는 사건으로 보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역으로 현대라는 시대에 대한 통절한 문제의식과 질문이 없다면 역사는 단순한 기록의 집적에 지나지 않으며, 암기해야할 사건들의 연대기일 뿐입니다.
역사란 확률의 집적
아무리 역사를 공부해도 실제로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결단을 내리기란 아무래도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 까닭은 역사의 본질과 관련이 있습니다. 역사란 과학적인 진실에서 빚어지는 세계가 아니라 가치 판단과 의미 부여를 통해 만들어지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그러하다'는 '필연성'이 아니라 '그러할 것'이라는 '개연성'으로 성립되는 것이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에 대해 '진실이다'가 아니라 '진실일 것이다'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사회와 미션
사물을 보는 방식이 달라지거나 복안의 시점을 통해 자신이 지금까지 받아들이지 못했던 시각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은 곧 '자신의 복수성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의 다른 면모를 깨닫고 또 다른 사고방식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타자와 사회와의 만남은 내가 몰랐던 나와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성이란 나의 외부에 다른 사람이 있고 다른 시각이 있어서 그것들이 각자 나름대로 공존하며, 동시에 내가 변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나의 역할을 깨닫고 미션을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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