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 일본인은 이중언어구조에 주박이 걸려있다.
일본어에는 영어의 size에 해당하는 말이 없습니다. 벌레의 크기라고 할 때 대다수 사람들은 대상이 큰지 작은지에 따라 '크기'와 '작기'를 교체합니다. 벌레 이야기를 할 때는 '크기'라는 말을 쓰더라도 '작기'를 이야기한다는 것을 문맥적으로 알아챕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영어가 국제 공통어가 된다면 영어 자체의 우주관은 붕괴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법과 어휘는 공통일지는 몰라도 각각의 모어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실어 나르는 사이에 그 말의 중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영어 자체가 품은 우주관의 구조가 와해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영어 화자의 세계관을 강력하게 규제하는 '언어의 우리'가 지닌 구속력은 잃어버리고 단순한 커뮤니케이션의 도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278 우리째 움직인다 = 정형을 신체화한다
우리는 늘 언어에 뒤쳐져 있습니다. 늘 모어에 대해 뒤처져 있습니다. 하지만 '뒤쳐져 있다;는 자각이 있다면 어디에선가 언어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언어의 형식성을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언어에도 이런 식으로 얘기해야 귀에 쏙쏙 들어온다든가 울림이 좋다든가 사람들에게 잘 전해진다든가 설득력이 있다는 식으로 국지적인 감각이 있는 법입니다. 국지적인 아름다움, 국지적인 논리성이 있습니다. 자신의 모어 운용에 대해 '보편적으로 아름답다'든가 '인류 공통의 논리가 있다;고 떠들어댈 수는 없습니다. 모어의 현실이란 본질적으로 국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지역이나 기간이 한정적인데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모어의 현실만 주어져 있지요. 우리는 그 지점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모어 현실의 질곡에서 확실하게 빠져나올 수 있는 방도는 역설적이게도 '별로 모험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어의 현실에 대해 공손함을 가장하고 마치 준법적으로 행동하듯 보여주면서 빠져나오는 것이지요.
우리를 빠져나올 방법은 원리적으로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더불어 우리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면서 운동하는 것입니다.
'우리째 움직인다'는 것은 다시 말해 정형을 신체화한다는 뜻입니다. 정형성을 신체화해서 자기 안에 완전하게 내면화해버리는 것이지요. 자신에게 주어진 국지적인 모어의 현실을 '보편성을 요구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철저하고 심오하게 내면화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한가지 유효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어로 쓰인 고전을 싹쓸이하듯 읽는 것입니다. 신체화한다는 것은 논리가 아닙니다. 정말로 싹쓸이하듯 읽어나가는 것, 자신의 육체에 파고들어올 때까지 읽는 것입니다.
신체화한 정형은 강합니다. 위험하지만 강합니다. 왜냐하면 모어의 정식적인 통사법, 수사법, 운율의 아름다움, 논리적 선명성을 충분하게 내면화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파격도 허용되기 때문입니다.
파격이나 일탈은 규칙을 숙지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악마는 신학적으로 천사가 타락한 것이라고 봅니다. 신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는 곳에서 악마가 고립적으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이 정해놓은 모든 규칙을 완벽하게 내면화하지 않으면 신의 의지가 실현되는 모든 경우에 훼방을 놓는 악마의 활동을 펼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는 악마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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