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 전해지는 언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떠드는 언어에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되풀이하지만 '자신의 분배 비율을 늘리기' 위한 언어는 '심사하는 사람'을 배타적으로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그 밖의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전해지는 언어'에는 '전하고 싶다'는 발언자의 절박함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에게, 가능하면 정확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싶다는 필사적인 마음이 언어를 움직입닏. 뜻하지도 않은 곳까지 언어가 닿도록 합니다.
304 이것만큼은 꼭 들어주어야 한다
전해지는 것은 언어의 내용이 아니라 언어를 전달하고 싶다는 열의입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 오고가는 언어의 대다수는 '전해지는 언어'가 아닙니다. '평가를 받으려는 언어'도 아닙니다. 단지 '나를 존경하라'고 명령하는 언어입니다.
우리는 앞서간 죽은 자들에게 'memories'를 이어받습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아주 작은 한 조각만 '내 기억'으로 남을 뿐입니다.
트라우마는 기술할 언어가 없는 '거짓 경험'이니까 '그것에 대해' 글을 쓰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가능한 것은 '그것이 글을 쓰는' 것 뿐입니다. '거짓 경험' 자체가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가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밀어붙이는 것 말고는 '삼킬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기능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언어는 '언어가 되지 못하는 것'을 모태로 삼아 생성됩니다. 그것을 '소울'이라고 불러도 좋고 '산 것'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그곳에서 나오는 언어야말로 진정으로 깊은 곳에서 다른 사람을 뒤흔듭니다.
자신이 직접 트라우마를 경험한 작가도 있습니다. 유아기의 정신적 외상이 인격의 어둠을 형성한 작가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경험에 대한 기억의 결여,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물려받은 작가, '거짓 경험'을 자신의 근거로 받아들인 작가는 어쩌면 별로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성에 근거를 이루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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