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낼의 논의에 따르면, 민주제는 이집트 문화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하나의 전대미문의 거대한 문제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친족의 기본구조>에서 고대사회나 미개사회는 그 사회의 근본을 이루는 교환의 구조, 현재의 고등수학과 같은 구조 때문에 여성의 교환으로 성립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피에르 르장드르는 맹렬히 비판을 했다. 프랑스는 특히 관료와 기업의 수준에서는 분명 친인척의 네트워크로 통치된다. 명가에서 명가로, 명가에서 엘리트로, 여성을 교환함으로써 연결된다. 그런 인습으로 사회를 유지하는 야만적인 프랑스인이 남의 문화를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다는 말이다.
혁명에 관해서는 치욕honte 과 굴육humilitation 이라는 2가지 정치철학적인 개념을 구별해야 한다. 이 구별은 가능하며, 필요할 뿐 아니라 필수이다.
굴육은 자신이 남자인, 이 사회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 남자라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 굴육은 남의 탓으로 돌릴 수 밖에 없다. 고통과 고난으로 자신을 변용시킬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굴욕이다. 한편 치욕은 자신의 삶 자체의 변화를 내포한다. 이렇게 마지못해 사느니, 비굴하게 목숨을 부지하느니, 이용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몸에 불 지르고 죽는 편이 낫다는 절대적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이 지진피해가 일어나기까지 일본의 원자력 체제에 관해 몰랐던, 알려고도 하지 않았으니 치욕으로 여겨야 할 일 아닌가요.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언제나 치욕이다.
모두의 책임이라면 이미 책임이 아니다. 책임은 국한되어야 책임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니. '1억 총참회'의 '무책임한 체계'를 재탕하자는 말인가요. 개별적으로 책임을 져야할 사람은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한 봉기에는, 또 사회를 고쳐쓰기 하려면 굴욕이 아니라 치욕만이 필요하다.
혁명은 대단히 구체적인 일로 촉발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충분히 치욕적으로 느끼느냐 마느냐가 관건이다.
눈은 감을 수 있다. 입은 다물 수 있다. 그러나 귀를 닫을 수는 없다. 정신의학의 지견을 봐도 귀는 감정에 개방된 기관이다. 예술을 개시하기 위한 영토를 천명하기 위한 예술은 청각과 관련된다
|
'반서재 Antilibr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보의 진화 - 정보와 엔트로피 (0) | 2019.02.10 |
---|---|
사사키 이타루,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 이것은 문학이 아니다 (0) | 2019.02.10 |
10배의 법칙 - '완벽할 정도'로 달려든다 (0) | 2019.02.08 |
10배의 법칙 - 돈을 아끼기 시작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즉각 다른 모든 것들도 아끼기 시작한다. (0) | 2019.02.08 |
10배의 법칙 - 평균은 실패로 가는 공식 (0) | 2019.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