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루아의 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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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세계를 동일시하고 싶은 욕망

니체는 '나와 세계'라는 표현을 야유하고, 이 '와'라는 표현이 이미 우스꽝스러운 웃음거리라고 했다. '나'는 세계의 방대한 생성의 일부에 불과하다. 동등할 리가 없으니 '와'라는 접속조사를 이용해도 두 가지를 하나로 묶기는 불가능하다. 

첫 번째는 '세계'를 시간으로 파악하며 '빙대한 과거와 미래'가 되므로 그것에 비하면 현재란 기껏해야 '내가 살고 있는 이 짧은 시간'이다. 이 말은 곧 자신과 자신이 살고 있는 날들과 다른 것, 즉 타인과 과거와 미래를 '모멸'하거나 '숭배'하려는 행동은 결국 같다는 뜻이다. 그들과 모멸도 숭배도 아닌 관계를 가질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반복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저의 신조이므로 다양한 자리에서 누누이 했던 얘기를 한 가지 하면 흔히들 특권시하는 '현재''는 실은 진정한 의미의 '현재'가 아니다. 결국 현재를 쫓아가는 사람이 쫓는 것은 1년 또는 반년 전부터 대략 어제까지의 '가까운 과거'이지 현재와 현실은 아니다. 쫓는다는 것은 모방한다. 다시 말해 '의식이 퇴행'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생생한 '현재', '지금 여기'는 있을 수 없다.

현재를 쫓는 사람은 앞서 말한 대로 실은 과거를 본다. 사람을 무한히 쇠약하게 하고 힘을 뺏는 사고이다. 그런 과거지향적인 사고에 저항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그래서 저는 '지금 여기'와 가까운 과거인 '현재'를 나누어서 생각한다. 


향수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든 그전이든 과거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 시절이 좋았지' 하는 말은 실은 오만한 언사에요. 자신이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하는지에 관한 두려움이 없어요. '그 시절'에 고단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을 잊었고, 바로 그 시절에 지금의 비참한 상황이 싹텄을지도 모른다. 


번역으로 문체를 단련하다

번역으로 문체를 단련할 수 있다는 말은 역시 사실이다.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이 대단하다는 시시한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글자와 말에 관한 모종의 이질감이 중요하다. 일사천리로 쓰고 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쓰는 글에 근근한 이질감을 새생하게 느끼는 것은 실은 글을 쓰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번역을 하다보면 아리고 근질근질한 느낌을 사무치게 느끼기 마련이다. 그것이 글쓰기 작업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한다. 



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국내도서
저자 : 사사키 아타루(佐佐木 中) / 김소운역
출판 : 여문책 2017.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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