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루아의 반서재

 

축복할 수 없다면 저주하는 법을 배워라

르상티망 ressentiment 적 발상  - '돈과 성공을 추구하는 것, 강해지는 것, 이기적으로 사는 것'을 나쁘게 여기고 '돈에 집착하지 않는 것, 약해지는 것,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않는 것'을 좋다고 여기는 것 

  • 겁쟁이의 비열함 → 겸허함
  • 되갚아 주지 못하는 무력함 → 선함
  • 약자의 소극성 → 인내심

현대에는 인생의 지침으로 삼을만한 답이나 지향할 만한 목표가 정해져있지 않은 막연한 상태다. 절대적인 목표가 없어서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것을 믿는 '자유사상가'의 시대다.

 

적극적 허무주의자

영겁회귀를 받아들이는 것 = 운명애

 

무한한 시간속에 같은 일이 반복된다. 설사 지금은 극복했다 해도 괴로움과 슬픔은 다시 닥쳐온다. 또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다만 설사 힘든 일이 되풀이되고 슬픈 일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해도 삶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 무기력해질 필요는 없다. 힘들거나 가혹한 상황에 처해도 '이건 내가 원한 상황이다'라고 생각해보자. 힘든 경험과 함께 느껴지는 기쁨도 있으니, 그거야말로 '자신의 인생 그 자체'라고. 설사 힘든 일이 여러 번 반복되더라도 '지금의 나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지금의 인생을 한 번 더 살고 싶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살면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초인'을 지향할 수 밖에 없다. 초인이란 한마디로 영겁회귀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설사 똑같은 괴로움, 힘든 일이 반복되더라도 '그게 바로 내 인생이다'라며 받아들이는 사람, 영겁회귀를 허무하게 받아들여서 '어차피 반복될테니 인생은 지루할 뿐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는게 중요해. 뜻밖의 힘든 일이 닥친다 해도 자신의 운명을 사랑해야해. '인생은 무의미하니까 자유롭게 살아 줄 테다!'라고 외치는 적극적인 허무주의자가 되어야해. 그게 바로 초인이야."

남들 눈을 의식해서 겁쟁이처럼 덜덜 떨기보다 자기 자신과 적극적으로 싸우자고! 숨어 살기보다 '인생을 위험에 노출'시켜야해! 겁먹어서 자신을 부정하기보다 무슨 일에든 맞서 싸워서 기쁨을 쟁취해야 해!

인생은 무의미하니깐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자는 그 위로로 병약해진다

사람이 무언가를 악이라고 생각할 때는 악의 반대편에 자신을 두게 된다. 악을 규정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 이건 우리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무언가를 부정하는 것은 그 반대쪽에 있는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셈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 현상, 결과도 '힘에의 의지'가 서로 대항하고 균형점을 찾은 결과일 뿐이다. 그러니깐 이렇게 된 건 저 사람 탓이라는 식으로 남을 탓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앞서 말한 '영겁회귀'처럼 어떤 힘든 일을 만나더라도 조절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것도 '내가 원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게 좋다. 마지막으로 기억할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힘을 위축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즉,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힘에의 의지'란 '좀 더 강해지고 싶다', '내 힘을 최대한으로 발취하고 싶다'라는 마음이다. 즉, '나 자신을 넘어서고 내 가능성에 무한히 도전하고 싶다'는 마음인 것이다. 힘에의 의지는 자기 내면에 숨어있는 강한 근성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말, 듣기 좋은 말에 감동할 때가 많다. 다 같은 감동이라도 동기가 다양한 것이다. 감동이란 불투명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추구해야할 감동도 있다. 이건 체험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힘에의 의지'와도 관계가 있는데 바로 자기 가능성이 넓어졌을 때 느끼는 감동이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자는 그 위로로 병약해진다. 우리를 가혹하게 만드는 자를 칭송해야 한다.' 자신을 지나치게 위로하면 결국은 병약해진다는 것을 기억하고 가혹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열정적으로 살지 않으면 시기심이 당신의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저는 신이 있고 없고를 '실증'하는데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다만 살면서 신을 믿어야 인생을 진지하게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신을 믿고 싶고, 또 믿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저에게는 나 자신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현대는 대중이 객관적 진리에 휩쓸리기 쉬운 '수평화 시대'이다. 대중은 개성적이고 주체적으로 사는 사람을 '시기'의 대상으로 삼는다. 개성적인 사람의 삶을 긍정하게 되면 자신들의 삶이 보잘것 없고 시시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전세계를 정복해도 자기 자신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자유의 현기증 - 가능성이라는 말만 들으면 긍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가능성이란 아직 찾아오지 않은 미래, 즉 아직 아무것도 없는 '무無'와 같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이런저런 선택을 해가며 텅 빈 미래를 개척해야 해요.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선택에 의해 만들어지는 거니까요.

자유로운 우리는 어떤 선택도 할 수 있으니 자신의 선택으로 미래를 포기할 수도 있어요. 내 선택에는 언제나 불안이 따르죠. 그러다보니 선택하기가 두려워져요. 무언가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보이면 그 불안은 더더욱 커지고요. 

사람은 뻔히 못 가질 것을 아는, 자신에게서 멀리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이 닿을 듯한 가까운 것에 대해 불안을 느껴요. 사람은 잘 될 가능성이 있을 때만 잘되지 않을 가능성에 불안을 느끼는 존재에요. 그러니까 불안이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그건 가능성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깐요. 

 

비본래적 절망 - 자신이 절말했다는 것을 모르면서 절망하는 것. 자신이 절망한 것을 자각한다면 아직은 괜찮은 셈이에요. 물론 긍정적으로 살면 강한 동기를 유지할 수 있어서 좋겠죠. 하지만 '언제나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관념이 되어 버리면 그건 더 이상 긍정적인 사고가 아니에요. 그저 자기 마음을 무시하는 버릇일 뿐이에요.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자기 마음에 뚜껑을 덮어 놓았을 뿐이에요. 

행복해보이는 사람이 되기보다 자신의 인생을 진지하게 마주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자신이 절망했다는 것도 모른채 자신을 계속 속여서는 안된다. 그리고 또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서, 승산이 있는지 확실히 판단한 후에 도전하겠다는 생각도 별로 좋지 않다. 불안에는 바닥이 없다. 불안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커지는 법이다. 그렇게 불안을 파고들면 한이 없다. 요컨대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도 낭비다. 

불안 앞에서 겁을 내는 건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자세다. 인생에는 믿음의 도약 leap of faith 이 필요하다. 바꿔 말하면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과감해져야 한다. 

 

건강한 거지가 병든 왕보다 행복하다

'정신적 궁핍은 외면적 궁핌을 끌어들인다.' 허무한 마음을 외면적인 것으로 메우려고 아무이 애써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자기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나 확증이 없으면서도 타인의 칭찬을 통해서 '나는 대단하다'고 믿을려고 한다. 자신의 대단함을 타인의 의견에 기초하여 확인하려고 한다. 그래서 허영심 많은 사람은 자신을 필사적으로 꾸미려고 든다. 자부심은 말이 적지만 허영심은 말이 많다. 자부심이란 자신에 대해 자신감과 긍지를 가진 상태를 말한다. 확고한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타인의 눈과 의견에 좌우되지 않는 여유가 있다. 그러나 자부심이 없고 마음에 여유가 없는 사람은 타인의 평가를 얻기 위해 자신을 꾸민다. 

 

사람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

나무를 보면 '나무가 있구나'라고 생각한다. '나무가 있구나'라는 인식이 바로 장막이다. 우리는 보통 무의식적으로 사물을 분류하거나 언어라는 장벽을 통해 세상을 본다. 만약 우리가 '나무'라는 존재를 모른 채 큰 나무를 처음 봤다고 치자. 그러면 '나무'라는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뭐야, 이 거대한 물체는!'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나무'라는 존재를 알고 있으니 나무를 보아도 놀라지 않아. 즉 '이건 나무야'라는 인식의 장막이 우리에게 이미 갖춰져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눈앞의 물체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지 않고 언어를 통해 분류한 다음에 인식하는 것이다.

존재란 그저 거기에 우연히 발생한 것일 뿐, 필연이 아니다. 그러니깐 '사람에게는 천명이 있다'라고 믿으려고 하는 이상적인 생각은 죄다 기만일 뿐이다. 그런 필연성을 믿는 건 기만이며 현실 도피일 뿐이다. 오히려 사람에게는 본질, 즉 살아있는 이유, 존재하는 이유가 없다는 건, 사람이 아무 것도 아닌 자유로운 존재라는 뜻이다.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살 수 있다. 즉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은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서 '투기投企'가 필요한 것이다.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것이다. 현재의 자신에게 고정되지 않고 미래를 향해 변모를 거듭하는 것이 사람이며, 그 변모를 어떻게 이룩하느냐는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타인이란 지옥이다. 당신은 당신의 일생 이외, 그 무엇도 아니다

대상화 - 우리가 타인에게 시선을 향하면 자신의 세상에 타인이 존재하게 되지만, 그 사람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볼 수 없다. 우리는 '남자가 있다'. '커플이 있다'는 식으로 그들을 물체로 인식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인식할 수는 있지만, 타인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볼 수 없고, 타인이 마음 속으로 생각하거나 사고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저 눈 앞에 있는 사람의 주관을 통해 세상을 볼 수는 없다. 

타유화 他有化 -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 닿는 순간에 물체화된다. 즉 타인에게 물체로 인식된다는 뜻이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한데 우리는 타유화된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타유화된 자신, 즉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을 '대타적 존재 對他的 存在' 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타인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치든 그것이 자신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타인에게 대상화된다는 건, 타인의 주관이 나에게 덮어씌워진다는 의미다. 자유로운 존재인 타인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내 시선을 밖으로 돌려보내는 것 뿐이다. 즉 타인을 대상화함으로써, 즉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 정도밖에 없다. 

 

사람은 마치 죽을 것처럼 모든 것을 두려워하고, 마치 불사할 것처럼 모든 것을 바란다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반드시 죽는다'라는 잔혹한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현재를 살아야 한다. 그런 선구적 결의가 있어야 '본래적' 삶을 살 수 있다. 본래적 삶이란 언젠가 자신에게 찾아올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밖에 살 수 없는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가능성, 남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며 사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생각할 때, 제대로 생각하는 듯하면서도 어쩐지 항상 모호한 희망으로 끝나버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근원적 시간'을 의식하는 일이다. 자기 인생에는 한정된 시간 밖에 남아있지 않나는 사실을 항상 자각하는 사람의 시간이 바로 '근원적 시간'이다. 

눈 앞의 일이나 일상에 정신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미래로부터 역산하여 자신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죽는다는 확고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를 다시 주목할 수 있는 것이다. 

 

 

진리는 두 사람에게서 시작된다

'놀라움이야말로 지혜를 구하는 시작이다' 그 말 그대로이다. 생각하는 계기가 되는 이 '번쩍임', 즉 놀라움은 '타우마제인 Taumazein'이라고도 불린다. 이건 일상에 필요해서 무언가 생각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니체가 교토에 와서 17살 나에게 철학을 가르쳐 주었다
국내도서
저자 : 하라다 마리루 / 노경아역
출판 : 대원씨아이니들북 2019.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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