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81
제 경우 소설의 아이디어 같은 걸 적어두는 일은 별로 없어요 손을 움직여 글을 쓰면서 생각하는 타입이라, 일정 분량 이상의 글을 쓰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일단 한 덩어리의 글을 써놓고 조금씩 손대며 고쳐나가고 그 사이 내 안에서 무언가가 자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런 걸 기다리는데, 여기에도 역시 시간이 필요해요. 써놓고 한두 달 지나면 소설이 된냐 하면 그건 아니거든요. 아무래도 반년에서 일 년, 일 년에서 이녀이 세월이 필요합니다.
p.82
네 일단 씁니다, 만약 친구가 와주지 않더라도 와줄법한 환경을 만들어둬야죠. 저쪽에 방석을 좀 깔아놓고 청소도 하고, 책상도 닦고, 차도 내려두고, 아무도 오지 않을 때는 그런 '밑준비'라도 해두는 겁니다. 아무도 안 오니깐 오늘은 실컷 낮ㅈㅁ이나 자볼까, 이러지는 않아요. 전 소설에 대해서는 근면한 편이라서요.
뭐가 어찌됐건 열장은 씁니다. 그러기로 했으니까요.
p.96
다만 객관적인 관찰자의 눈으로 실행범을 바라보면 그들 역시 덫에 걸린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덫에 걸린 것도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덫은 자기도 모르게 덜컥 걸려드는 법이니깐요. 저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고, 주위 사람을 봐도 알 수 있죠. 인생에는 위험한 덫이 가득합니다. 섬뜩한 일이 수도 없이 일어나요.
그러나 그런 설명으로 이 세상을 설득하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말하기는 쉽지만, 많은 사람이 잘 실감하지 못하죠. 그런 구문을 이야기라는 차원으로 이행시키지 않으면 본질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책을 쓰면서 실감했어요.
p.100
트럼프는 고대 사제처럼 사람들의 무의식을 건드리는 요령을 체득했지 싶어요. 그리고 그런데서는 트위터 같은, 개인 대 개인의 디바이스가 강력한 무기가 되죠. 그가 구사하는 논리와 어휘는 상당히 반지성적이지만, 그만큼 사람들이 지하에 안고 있는 부분을 매우 전략적으로 교묘하게 집어낼 수 있어요.
논리적인 세계, 집에 비유했을 때 1층의 세계가 나름의 힘을 발휘할 때는 잠잠하지만, 1층의 논리가 힘을 잃으면 지하가 지상으로 솟구쳐버립니다.
'좋은 이야기' '중층적인 이야기' 보다 '나쁜 이야기' '단순한 이야기' 가 사람들의 속마음에 한층 강렬하게 가닿는다는 건 부정할 수 없어요. 아사하라 쇼코가 제공한 이야기도 결과적으로 분명 '나쁜 이야기'였고 트럼프가 하는 이야기도 상당히 뒤틀린, 굳이 말하자면 '나쁜 이야기'를 끌어내는 요소를 지니고 있지 않나, 저는 그렇게 느낍니다.
p.104
말 그대로 '동굴화' 예요. 사람들이 보내온 메일에 하나하나 개인적으로 답해나가는 것.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아ㅏ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내 소설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구나 하고 실감하죠.
역서 무엇보다 중요한 게 말투, 소설로 말하면 문체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친밀감과 신뢰감을 낳는 건 말투에요. 말투나 문체에 흡인력이 없으면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죠. 물론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말투에 매력이 없으면 사람들은 귀기울여주지 않습니다. 보이스, 스타일, 말투를 매우 중요시합니다. 제 소설은 너무 쉽게 읽힌다는 말을 곧잘 듣는데, 당연합니다. 그게 저의 '동굴 스타일'이니까.
일단 눈 앞의 사람에게 말을 거는 거죠. 그러니 늘 하는 말이지만, 뭐가 됐든 알기 쉬운 말, 말로 소설을 쓰려 해요. 최대한 쉬운 말로 소설을 쓰려해요. 최대한 쉬운 말로 최대한 어려운 이야기를 하자. 마른 오징어처럼 몇 번이고 곱씹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려 하죠.
p.106
대부분의 경우 좋은 이야기와 나쁜 이야기를 준별하는 것은 시간의 역할입니다.긴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준별 가능한 것도 있고요.
좋은 일은 이해하거나 설명하는데 시간이 걸리거니와 귀찮고 따분한 경우가 많아요. 반면 나쁜 이야기는 대체로 단순하고 인간 심리의 표층에 직접적으로 호소하죠. 논리가 생략되었으니 이야기가 쉽게 받아들여져요. 거친 말을 쓴 헤이트스피치가 논리적이고 훌륭한 연설보다 귀에 잘 들어오는 법이고.
p.108
게임의 아날로지로 말하면, 프로그래밍하는 입장과 플레이하는 입장이 제 안에서 완전히 분리된 겁니다. 1인 체스 같은 것이죠. 먼저 이쪽에서 말을 움직이고, 그 사실을 잊고 상대편으로 가서 '으음....' 하며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움직이고, 다시 이쪽으로 돌아와서 그 다음 수를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의식을 완전히 분리할 수 있으면 혼자라도 체스를 즐길 수 있어요. 이거 굉장히 재미있는 일입니다.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 by 글렌 굴드 1995년 버전
보통 피아니스트는 오른손과 왼손의 콥비네이션을 생각하며 연주하잖아요.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다들 그럴 거에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글렌 굴드는 달라요. 오른손과 왼손이 전혀 다른 일을 하는 겁니다. 오른손 왼손이 각자 자기 뜻에 따라 움직여요. 아무리 봐도 왼손은 왼손이 할 일만, 오른손은오른손이 할 일만 생각한단 말이죠.
p.123
머리로 해석할 수 있는 건 글로 써봐야 별 의미가 없잖아요. 이야기는 해석이 불가능하니깐 이야기인 것이죠. 여기에는 이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면서 작가가 일일히 포장을 풀어헤치면 재미고 뭐고 없어요. 독자는 맥이 빠질 테고요. 작가조차 몰라야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의미가 자유롭게 부풀어나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p.127
자신의 문체없이 지하 깊숙이 내려가기는 불가능합니다. 굉장히 위험해요. 문체는 생명줄이나 마찬가지거거든요.
문체를 만드는 것, 그게 거의 다예요. 어쨌거나 조금이라도 좋은 문장을 쓰는 것, 나의 문체를 보다 탄탄하게 만드는 것, 보통은 그것만 생각합니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스토리에 맞춰 글을 써가지만, 그때는 다른 쪽에서 날아오는 것을 리시브할 뿐이에요. 그러나 문체는 다른 쪽에서 와주지 않아요. 자기 손으로 준비해야죠. 그리고 날마다 진화해야 합니다.
문체는 점점 변화합니다. 작가가 살아있으면 문체도 그에 맞춰 살아 숨쉬죠. 그러니 매일 변화를 수행할테고요. 세포가 교체되는 것처럼, 그 변화를 끊임없이 업데이트하는게 중요해요. 그러지 않으면 자기 손에서 떠나갑니다.
p.152
제 소설은 '말려들기형'이라는 말을 듣거든요. 사실 장편소설이란 동서고금 어떤 작품이든 기본적으로 '말려들기형' 이야기에요. 주인공은 매우 뉴트럴한 존재인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야기의 흡인력에 점점 끌려들어가며 여러 곳에서 특이하고 불가사의한 체험을 합니다. 그리고 독자는 기본적으로 주인공이 올바른 사람임을 알고 있어요. 저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사람은 절대 이상한 놈이 아니야. 생각하는 거죠. 나름대로 올바른 가치관을 지닌 보통 사람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독자도 그의 시점을 빌려 '좀 희한한 이야기' 혹은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어요.
장편소설에는 뭐랄까. 그런 일종의 '수용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게 없으면 장편 소설은 성립하지 않아요. 모두 주인공이 영문 모를 불행을 겪죠. 읽으면서 그 상황은 잘 이해되지 않아도 주인공의 기분은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어요.
p.163
전 그저 그것에 '이데아'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고, 진짜 이데아, 플라톤의 이데아와는 관계없습니다. 그냥 이데아라는 말을 빌려온 거죠. 어감이 좋아서. 게다가 기사단장이 '나는 이데아'라고 자기 소개를 했을 뿐. 그가 진짜 이데아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몰라요.
p.167
의식이란 것에 대해서는 꽤 자주 생각하는 편입니다. 인간의 의식이 등장한 건 인류 역사에서 훨씬 뒤의 일이지요. 그전에는 거의 무의식밖에 없었고, 그 무의식의 중심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개인이 아니라 집합적으로 판단을 내리며 살았죠. 그리고 도시가 생기고 보다 고도의 조직과 시스템이 완성됨에 따라 '무의식'으로 행하던 일들이 점차 '의식'의 영역으로 격상됩니다. 보다 논리적이 되고요. 그렇지 않으면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유지할 수 없으니깐요.
p.169
작가로서 재능이 있느냐고 한다면 그건 모르겠고, 또 제게는 큰 상관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메시지를 받는 능력 혹은 자격이 있느냐가 훨씬 중요해요.
p.172
그래서 제가 늘 하는 말이 작가는 자발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젊을 때는 마감이 닥쳐오는데 머릿속은 텅 비고 아이디어 하나 없이 막막한 상황에서도 책상 앞에 앉아 막무가내로 쓰다보면 무언가 찾아오곤 해요. 찌릿찌릿하면서. 그렇게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어요.
p.173
이것도 늘 하는 말인데, 머리가 너무 좋은 사람은 소설을 쓸 수 없어요. 소설이 아니라 진술이 되어버린다고 하죠. 머리가 너무 좋은 사람이 쓴 소설은 구조가 빤히 들여다보일 때가 많아요. 읽어도 솔직히 재미있지 않고. 이성이 우세하니 일방통행의 진술이 되어버리죠. 평론가야 칭찬하지만 독자는 생기지 않아요. 물론 너무 바보여도 쓸 수 없고.
p.177
왜 결말이 긍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장편소설은 쓰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읽는 일도 엄청난 작업이잖아요. 그 엄청난 작업을 해낸 사람을 위한 일종의 보상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아무래도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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