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루아의 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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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비가역성은 혼돈에서 질서를 가져오는 매커니즘이다. 

- 일리야 프리고진


정보의 물리적 기원을 이햐하기 위해 정상상태라는 용어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정상상태는 크게 '동적 정상상태dynamic steady state' 와 '정적 정상상태static steady state'로 나눌 수 있다. 커다란 그릇에 구슬을 던지면 한동안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가장 깊은 곳에 멈춰 서는데, 이런 경우 구슬은 '정적 정상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물에 떨어진 잉크방울이 퍼지면서 골고루 섞이는 것도 동적 정상상태의 한 사례이다. 

비평형계는 '다량의 정보가 내재된 정상상태'로 특징지어진다. 이 사실을 이해하면 정보가 어디서 오는지 이해할 수 있다. 지구와 같은 비평형계 정보가 출현하는 것은 충분히 예측가능한 일이므로 변칙이 아니다. 그러나 나쁜 소식은 엔트로피라는 녀석이 다량의 정보를 포함하고 있는 변칙적 상태의 경계에 항상 잠복하고 있다가 기회가 포착되면 이 변칙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욕조에서 발생한 소용돌이는 물이 모두 빠지거나 배수구를 막는 즉시 사라진다. 

그러나 다행히도 정보에게는 비장의 방어책인 점착성이라는 성질이 물리적 특성안에 포함되어 있다. 정보에 점착성을 부여한 일등공신은 열역학적 포텐셜thermodynamic potential이었다, 물리계의 정상상태는 열역학적 포텐셜이라는 수학적 함수의 최소값으로 서술된다. 1947년 프리고진은 "정상상태에 놓인 비평형계에서는 엔트로피 생산량이 최소화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즉, 비평형계는 질서를 자발적으로 생성하여 정보 훼손이 가장 적은 정상 상태로 자기조직화한다는 뜻이다. 

비평형계의 통계적 특성은 정보의 기원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이것만으로 정보가 오래 간직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정보가 재결합되고 생명과 경제가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정보의 내구성 덕분이었다. 그러나 정보의 기원을 설명하는 법칙만으로 정보의 내구성을 보장할 수 없다. 

정보가 점착성을 갖고 재결합될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고체" 속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용돌이를 빠르게 얼리면 유체에서 생성된 정보를 가둬둘 수 있고, 이 고형화된 정보를 이용하여 복잡한 세상을 재구성할 수 있다. 

정보가 많으려면 비주기적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생명이란 분자의 비주기적이고 고형적인crystalline인 성질에 기인한 현상이다. 분자에 정보가 저장될려면 비주기적이어야 하고, 그 정보가 오래 유지되려면 구조가 견고해야 한다. 

그러나 정보가 자라나려면 견고한 고체와 역학적 소용돌이 외에 또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 우주는 정보를 양육하기 위해 교묘한 트릭을 구사하고 있다. 물질이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 또는 물질의 계산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계의 화학적 변화가 화합물에 담긴 정보를 수정하는 과정은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계산'이며, 생명은 바로 이와 같은 '물질의 계산능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시간의 비가역성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살펴보자. 시간은 오직 미래로만 흐른다. 시간이 과거로 흘러도 물리법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건만, 현실세계에서는 이 대칭이 붕괴되어 있다. 왜 그럴까?

여러 개의 입자로 이루어진 혼돈계에서는 시간의 역행이 불가능하다. 이런 계의 시간을 거꾸로 되돌리려면 무한히 정확한 속도가 입력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무한대의 정보가 필요하다. 또한 통계적 계가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는 또 한가지 이유는 현재 상태에서 진행할 수 있는 경로가 무한히 많기 때문이다. 이런 계는 상태가 변할 때마다 방금 전의 상태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프리고진은 이 무한대를 엔트로피 장벽entropy barrier이라 불렀다. 그는 과거가 도달할 수 없는 시제일 뿐만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않는 허구라고 주장했다. 과거는 한때 존재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There is no past, although there was a past). 우리의 우주에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으며,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매순간마다 계산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재뿐이다. 이렇듯 이 세상은 다분히 즉흥적이다. 즉흥적 우주는 미세 규모에서 과거를 일일이 계산할 수 없기 때문에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 프리고진의 엔트로피 장벽이 과거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이다. 

정보의 진화
국내도서
저자 : 세자르 히달고 / 박병철역
출판 : 문학동네 2018.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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