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치료 역사의 영웅
엘리스가 남긴 유산 가운데 가장 끈질기게 남아있는 것을 들자면 아마도 심리학의 실습 과정에 주입된 '긴급함'과 행동'이라는 요소일 것이다. 열아홉 살 때 "곰곰이 생각함으로써 걱정을 만들어낼 시간"을 스스로에게 주지 않는 방법으로 수줍음을 치료했듯이, 앨리스는 커리어를 쌓는 내내 말보다는 행동을, 사색보다는 노력을 처방하는 강건하고 현실적인 정력가의 이미지를 다졌다. 이 같은 엘리스의 접근 방법은 오늘날 널리 실시되는 심리 치료법인 인지 행동 치료 (cognitive behavioral therapy, CBT)의 선조 중 하나다. 이 치료의 목적은 건강하지 않은 자기 파괴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비생산적 사고 습관을 파악하고 제거하는 것이다.
수치심의 방패
심리학자 피어스 스틸 Piers Steel 은, 모든 미루기의 핵심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선호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일을 미루는 것은 대개 현재는 구체적으로, 미래는 추상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 미루기 성인 성 엑스페디투스
투두 리스트의 도서관
<궁극의 리스트>에서 움베르트 에코는 도저히 표현이 힘든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리스트라고 말했다. 에코에 따르면, 우리가 리스트에 끌리는 이유는 리스트가 가진 그 무한함 때문이다. 리스트는 한계가 없으며 절대 오나성될 수 없다. "우리에겐 한계가 있다. 몹시 좌절스럽고 굴육적인 한계, 바로 죽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계가 없다고, 그러니깐 끝이 없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을 좋아한다." 에코의 말이다. "우리는 죽음을 원치 않기 때문에 리스트를 좋아한다." 버킷리스트는 욕심과 자기 계발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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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리스트를 만드는 건 일을 해치우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다. 정확히 그 반대다. 나는 리스트를 작성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성취로 느껴지기 때문에, 그러므로 리스트에 적어둔 목표를 성취해야할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같기 때문에 리스트를 좋아한다.
생산성의 아이콘
일을 미루는 사람으로서, 나는 게으름을 피우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먼저 내키는 대로 책도 한 권 더 읽고, 콜트레인 음반도 듣고, 샤워도 하고, 공원도 산책한다. 이 모든 건 '글쓰기'라는 항목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나는 술 한 잔을 손에 들고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로보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글을 쓰고 있는 거야. 때가 되면 '글쓰기'를 멈추고 진짜 글을 쓰기 시작할거야.
머무르는 한, 우리는 완벽하다
작가는 실패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오래도록 글을 붙잡고 마무리하지 않는 한 굉장한 작품이 나올 가능성은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무엇이든 가능하다.
이게 바로 일을 미루는 사람들이 자기 프로젝트를 완성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작업 과정에 머무르는 한 완벽을 꿈꿀 수 있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끝마치는 순간 그 프로젝트는 또 한 명의 불완전한 창작자가 만들어낸 의도만 좋은 (실패한) 작품이 되어버리고 만다. 영지주의*를 설파했던 바실리데스 Basilides 는 존재가 퇴보의 한 형태라고 생각했다. 오직 비존재만이 완벽을 주장할 수 있다. 무언가를 존재하게 하는 건 곧 그것을 망치는 길이다.
* 영지주의 : 헬라 철학과 동양의 이교 사상, 유대교 사상 등이 혼합된 종료 운동으로, 영과 정신은 선하고 육과 물질은 약하다는 극단적 이원론을 주장했으며 참된 지식을 가진 자신들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같은 길을 뱅글뱅글 돌면서, 나는 감상에 푹 젖어 미루기란 일종의 상실 아닌가 생각했다. 미루기는 시간 차원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하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공간 차원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상태였지만 말이다. 그랬다. 문자 그래도 진짜 길을 잃어버렸다. 내 생각에 미루는 것과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의 차이는 일을 미루는 사람은 방향감각을 상실하기로 직접 선택한다는 점이다. 미루기는 일종의 시간 여행이며, 해야 할 활동을 구체적인 현실에서 추상적인 미래로 넘겨버림으로써 시간을 조작하려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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