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루아의 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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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에게 ‘성공’은 결국 비교의 산물이다.
한마디로 “남보다 위.”

하지만 이 정의를 채택하는 순간, 결말은 이미 정해진다.
남보다 잘난 것이 곧 성공이라면, 세상에 성공자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다수는 자신의 ‘성공’ 정의가 잘못되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애초에 의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평생 비교 속에서 살고, 그 비교는 때로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비교는 끝이 없는 상대놀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비교는 함정, 그것도 아주 깊은 함정이다.

 

어떤 이들은 이 사실을 꿰뚫어 보면서도 도망치지 않는다.

대신 담담히 받아들인다. 이들은 마음의 힘으로 분별한다.

비교가 있어야만 가능한 행복비교 없이도 충분히 가능한 행복을.

그리고 비교 없이도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찾아내거나 직접 만들어내는 데 시간을 쓴다.

물론 대가는 따른다.

그러나 그들은 기꺼이 감수하고, 즐겁게 살며, 조용히 아파한다.

  • 한 외과의사는 막 생을 건진 청년 앞에서 커다란 행복을 느낀다.
  • 한 중학교 교사는 15살 학생들에게 감성과 이성의 차이를 설명한 뒤 깊은 보람을 느낀다.
  • 한 생물학 연구자는 배양한 균을 관찰·기록하는 일이 너무 신기하고 즐거워 매일 아침 실험실로 달려간다.
  • 한 어머니는 잠든 아이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며 설명할 수 없는 행복에 젖는다.

삶에서 비교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그러나 비교 없이도 누릴 수 있는 행복은 결코 적지 않다.

문제는 우리가 그 사실을 자주 잊는다는 것.

그래서 대부분은 비교로만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좇다 시간을 낭비하고, 결국 더 큰 고통을 떠안는다.

 

시간은 그런 대가를 치르기 어려운 사람을 위해 멈춰주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면 되돌릴 수 없다.

어떤 이는 다음 생을 기대하며 오늘을 포기하고, 더 비극적인 이는 다음 세대에 희망을 건다.

하지만 그들이 전하는 경험은 “오래된 경험”일 뿐, 종종 “잘못된 경험”이다.

 

사실,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성장’이다.
‘성공’이 타인과의 비교라면, ‘성장’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를 비교하는 일이다.

이 비교는 더 깊고 단단한 만족감을 준다.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보자.
“지금 내가 얻는 기쁨이나 행복은 비교에 기대고 있는가?”

만약 비교 없이도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이라면, 그 선택을 우선하자.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은 속도로 흐르지만, 그렇게 시간을 쓰는 사람의 삶의 밀도는 전혀 다르게 쌓인다.

매 순간, 매 분, 매일, 매해—
그가 경험하는 시간은 더 깊고, 더 충만해진다.

 

李笑来《把时间当作朋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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