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루아의 반서재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 Anmerkungen zu Hitler

 

"좋든 싫든, 오늘 이 세계는 히틀러의 작품이다."

- 제바스티안 하프너

 

 

 

 

 

"어째서 우리는 은행과 공장의 사회화 따위가 필요한가. 만일 사람들을 확고하게 하나의 규율 안에 집어넣고 나올 수 없게 한다면, (은행과 공장의) 사회화라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인가. .... 우리는 사람이 사회화한다."

이것이 히틀러 민족사회주의(나치즘)의 사회주의적 측면이다.

마르크스처럼 생산수단의 사회화만을 사회주의에서 결정적인 혹은 유일한 표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치당의 이런 측면이 사회주의라는 것을 부인할 것이다. 히틀러는 생산수단을 사회화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마르스크주의자에게는 이 말이면 모든 것이 끝이다. 하지만 조심하라.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사회주의 국가들도 생산수단의 사회화로만 끝내지 않고, 그에 덧붙여서 '인간을 사회화'하는 일에 상당히 노력을 기울인다. 곧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람들을 집단으로 조직하고 집단적 또는 '사회주의적' 삶을 살도록 강요하며 그들을 '확고하게 하나의 규율 안에 집어넣기' 위해 무척 애를 쓴다. 마르크스와 달리 그것이 사회주의의 더욱 중요한 측면이 아닌지 심각한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사람들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서로 대립하는 범주로 갈라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반대를 자본주의가 아닌 개인주의로 보는 것이 더 맞다. 아니면 적어도 중요하다. 산업화 시대에 사회주의는 일종의 자본주의를 완전히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도 자본을 축적하고 새롭게 하고 확장해야 한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관리자나 엔지니어의 노동방식과 사고방식은 완전히 동일하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공장노동은 피할 길이 없이 소외된 노동이다. 작업하는 기계와 컨베이어벨트가 민간기업 소유냐 국영기업 소유냐에 따라 노동자의 노동의 성격이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노동이 끝난 다음 자기 멋대로 해도 되느냐 아니면 공장 문 밖에 집단 또는 '공동체'가 기다리느냐는 매우 다른 문제이다. 인간이 노동에서 소외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인간의 다른 인간에게서 소외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목적이 인간의 소외를 없애는 것이라면 인간의 사회화가 생산수단의 사회화보다 이런 목적을 훨씬 크게 달성한다.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부당함을 제거하는 정도이다. 그것도 지난 30년 또는 60년의 세월 동안 입증된 바로는 효율성을 대가로 지불하고 얻는 이점이다. 하지만 인간의 사회화는 실제로 소외를, 그러니까 대도시에서의 소외를 제거하는데, 이 경우 개인의 자유를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 자유와 소외란 동전의 양면이고 공동체와 기율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가족 이외의 공동체나 집단 생활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적인 강제가 있든 없든 임의의 가입은 아니다. 또한 이런 모임에서 맛보는 편안함, 동지애, 행복감 등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이런 행복을 느끼도록 강요했다는 점에서 히틀러는 의심의 여지없이 사회주의자였으며, 그것도 매우 성공적인 사회주의자였다.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
국내도서
저자 : 제바스티안 하프너(Sebastian Haffner) / 안인희역
출판 : 돌베개 201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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