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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전쟁에 패배했다는 사실로 인해 일본인의 글쓰기에는 어쩔 수 없는 '이해하기 어려움'이 각인되고 말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글쓰기의 핵심에 투라우마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트라우마는 '적절하게 언어화할 수 없다'는 무능력 자체가 인격의 근원적인 부분으로 자리 잡는 경험을 말합니다. 트라우마를 언어화할 수 있는 사람은 트라우마를 끌어안은 사람과 이미 다른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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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로 통합할 수 없는 인격적 요소는 '요괴'가 되어 회귀합니다. 프랑스어로는 유령을 '돌아온 것 revenant'라고 말하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요시모토 다카아키 등이 하려고 한 일은 트라우마를 치유하여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를 끌어안은 사람(=대일본제국에 몸의 반쪽을 남겨둔 소년)을 통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롭고 광활한 문맥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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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이 듭니다. 세계 문학은 자신이 있는 곳을 '외부의 시선'으로 보는 능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적인 문맥을 공유하지 않는 타국의 독자들과 '대상에 대한 거리감'을 나눌 수 없습니다. 거기에 쓰여 있는 것에 대해 독자는 글쓴이가 '자신과 똑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장소'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세계문학이라면 글쓴이가 바로 자기 옆에 서서 '이봐, 저것은 어떻게 생각해?'하고 작은 소리로 친근하게 말을 거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작품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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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다카아키의 사상은 세계성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본질적으로는 세계적인 사상이었지만 세계 각국의 지역성이 그것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함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번역이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번역하지만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번역하지 않는 까닭은 요시모토 다카아키가 '국지적local'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요시모토 다카아키가 '온갖 나라의 사람들이 외면하려고 하는 일'을 다루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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