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루아의 반서재


yo
yo by checoo 저작자 표시



1.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자는 그 대상을 본질로서 지닐 수 없다. 만일 눈이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다면, 그 눈은 붉은 대상을 지각할 수 없을 것이다. 붉은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눈이 맑거나 '붉음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괴로움을 관찰하거나 주시할 수 있다면, 자신에게는 괴로움이 없음을, 주시된 혼란에서 자유로운 상태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내면에서 고통을 느끼는 그 자체는 고통을 갖고 있지 않으며, 두려움을 느끼는 그것은 두려움이 없으며, 긴장을 지각하는 그것에는 긴장이 없다. 어떤 상태를 주시하는 것은 이미 그 상태를 초월한 것이다. 그것들을 앞에 놓고 정면에서 보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들이 뒤에서 습격해올 염려는 없다. 

- St.Thomas


2.

자신이 자신을 스스로 꼬집으면서 누군가에게 아픔을 멈추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꼬집기를 멈출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를 꼬집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자신이 실제로 스스로를 꼬집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 때 처음으로 꼬집기를 자발적으로 멈출 수 있게 된다. 자신의 팔을 어떻게 들어올릴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지 않듯이, 어떻게 하면 꼬집기를 멈출 수 있는지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양쪽 다 수의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핵심은 자신이 어떻게 근육을 긴장시키고 있는지를 직접 느껴보는데 있다. 단, 근육 긴장을 이완시키려고 노력하지는 말라. 이완시키려고 애쓰기 보다는 언제나 그렇듯 그 역을 시도해야 한다. 


전에는 결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해야 한다. 특정한 긴장을 일부러 적극적으로 증가시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긴장을 고의적으로 증가시킴으로써, 무의식적으로 하던 꼬집는 행동을 적극적으로 의식화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어떻게 자신이 스스로를 꼬집어 왔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문자 그대로 스스로를 어떻게 공격해왔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런 것을 조목조목 이해하고 느끼면, 근육의 긴장으로부터 에너지가 해방된다. 그렇게 해서 그 에너지를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환경을 향해 밖으로 방향전환시킬 수 있게 된다. 자신을 책망하고 공격하는 대신 일, 책, 맛있는 식사를 향해 돌진할 수 있게 된다. 공격성(aggression)이라는 단어의 올바른 의미, 즉 "~을 향해간다"는 의미를 새롭게 배우게 된다. 


3. 

그러나 이런 블럭의 해소에는 똑같이 중요한 두 번째 측면이 있다. 첫번째는 관련된 근육을 더 경직시킴으로써 압력이나 긴장을 고의로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무의식적으로 해왔던 것을 의식적으로 해보라. 그러나 이런 긴장 블럭이 어떤 중요한 기능을 해왔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그것들이 최초로 도입되었던 것은, 한때 위험하거나 금지된 것이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 느낌과 충동을 질식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런 블럭은 특정 감정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들 블럭을 완전히 해소시켜 없어지게 하려면, 근육에 갇혀 파묻혀있는 감정에 대하여 자신을 개방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들 '파묻혀있는 감정'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근육 속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광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대체로 꽤 온순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블럭들은 흔히 눈물을 흘리거나, 한두 차례 비명을 지르거나, 억제되지 않은 성적 절정감을 체험하거나, 예전부터 써온 그다지 해롭지 않은 울화통 풀기 또는 베게에 대한 화풀이만으로도 해소되는 것이다. 


4.

지금까지는 자신의 심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심신에 강하게 집착하게 되었고, 그것들의 제한된 관점에 속박되어 있었다. 전적으로 심신과 동일시했었고 심신의 문제, 고통, 괴로움에 속박되어 있었다. 그러나 심신을 끈기있게 바람봄으로써, 그것들이 단지 자각의 '대상', 실은 초개아저거 주시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마음과 몸과 감정을 갖고 있지만, 나는 마음과 몸과 감정들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오직 페르소나와의 정체성으로부터 더욱 충실하고 정확한 자아 전체와의 정체성으로 하강하더라도, 그는 페르소나와의 접점을 잃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그것에 집착하지 않게 될 뿐이라는 것을 상기하기 바란다. 페르소나 수준에서 자아 수준으로 하강할 때 해체되는 것은 그림자나 페르소나가 아니라  그 둘 사이의 경계와 그로 인해 생긴 전쟁인 것이다. 


5.

모든 의식있는 존재가 똑같은 내면의 나를 갖고 있음을 이해하는게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 그 무수한 초월적인 나들이 실은 하나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이미 추측해보았듯이 만일 당신이 다른 몸을 갖게 되더라도 여전히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나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사람이 지금 이 순간 모두 느끼고 있는 그것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다른 관점, 다른 기억, 다른 느낌이나 감정을 갖고 있는 '단일한 나' 또는 '진정한 나' 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것이 아닐까?


또한 그것은 지금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언제나 존재한다. 당신이 아무런 의심없이 20년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동일한 사람이라고 느낀다면 - 기억, 마음, 몸은 변했다 하더라도 나라는 느낌의 측면에서 - 마찬가지로 200년 전에도 그것과 동일한 나가 있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만일 그 느낌이 기억이나 마음, 몸에 좌우되지 않는다면 20년 전이나 200년 전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물리학자 슈뢰딩거의 말을 들어보자. "당신의 자신의 것이라고 부르는 한 덩어리의 지식과 느낌과 선택이 그다지 머지않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출현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차라리 이 지식과 느낌,  그리고 선택은 본질적으로 영원하고 불변인 것이고 모든 사람, 모든 감각 있는 존재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


6.

당신은 초월적인 나를 보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무슨 수를 써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당신의 눈은 자신의 눈 자체를 볼 수 있는가?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자신의 기억, 마음, 몸, 감정, 사고와의 잘못된 동일시를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깨는 일 뿐이다. 이런 파기에는 초인적인 노력이나 이론적인 이해같은 것은 전혀 필요치 않다. 필요한 것이라곤 '당신이 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보는 자일 수는 없다'는 단 한가지 이해뿐이다. 



무경계
국내도서
저자 : 켄 윌버(Ken Wilber) / 김철수역
출판 : 정신세계사 2012.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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