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루아의 반서재

'왜 갑자기 이 모든 걸 이해하게 된 거지?' 나는 궁금했다. '이런 사실을 누가 알려주는 걸까? 신인가? 크리슈나? 부처? 예수? 그 때 갑자기 신이란 '존재 a being' 가 아니라 '존재의 상태 a state of being' 라는 깨달음이 왔다. 그리고 내가 지금 바로 그 '상태'에 있었다.

 

당신은 오로지 손전등으로 비추는 것만 볼 수 있고, 이미 알고 있는 것만 그게 무언지 인지할 수 있다. 물리적 세계에서의 삶이 바로 이와 같다. 우리는 특정 시점에 감각을 집중하는 것만 알 수 있고, 또 이미 친숙한 것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그 곳의 전등 스위치를 툭 켰다고 상상해보자. 눈부신 빛과 소리, 색깔 들이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면서 당신은 처음으로 창고 전체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은 당신이 상상한 어떤 모습과도 다르다. 과거에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당신을 둘러싼 이 광대한 경이 속의 한 점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 상상도 못했던 것들이 당신이 익히 알고 있던 것들과 함께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설령 다시 스위치를 끈다고 해도 당신이 경험한 이 새로운 앎, 그 명징함과 놀라움, 아름다움, 엄청난 활기는 그 무엇도 도로 앗아가지 못한다. 창고안에 이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한 번 알게 된 이상, 그 앎은 무슨 수로도 되돌릴 수 없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것에 닿을 수 있는지, 무엇이 가능한지를 당신은 이제 그 작은 손전등 하나에 의지하던 때에 비하면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눈부시도록 투명한 순간에 경함한 모든 것들에 대한 경이감이 당신에게 남아 있다. 이제 삶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고, 이 자각으로부터 앞으로 이어질 새로운 경험들이 만들어진다. 

 

 

삶이 목적이 없는 것 같고 길을 잃은 듯한 기분이 들 때, 그것은 바로 내가 자신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본연의 모습에, 내가 이곳에 와 있는 목적에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일은 내가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을 때, 텔레비전 광고나 신문, 대형 제약 회사, 친구들, 문화적, 사회적 신념 같은 외부 원천에 내 힘을 내어줄 때 일어나곤 했다. 

과거에 내가 길을 잃었다고 느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답을 찾으러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책을 찾았고, 선생과 구루를 찾았다. 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더 알 수 없었다. 내 자신의 힘을 자꾸만 바깥의 누군가에게 줘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으로부터 보는 관점 inside-out view 을 갖는다는 건 내 내면의 안내자를 온전히 신뢰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온 우주가 영향을 받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내가 이 우주 그물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전체가 나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다. '중심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우주 그물의 중심에 잇는 나를 느낀다는 뜻이다. 바로 내 위치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다른 세상에서 그렇게 명징한 상태에 있는 동안, 나는 내가 여전히 두려움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이해했다. 나는 걱정에 사로잡혀서 내 진정한 모습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암은 처벌도, 그 비숫한 무엇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암은 그저 내 자신의 에너지였다. 내 에너지가 두려움 때문에 내 본연의 장엄한 힘으로 표현되지 못하자 암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내 믿음을 방어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은 경우 쉽사리 그것을 놓으려 하지도 않는다. 내게 더는 들어맞지 않는 생각일지라도 말이다. 그때부터는 내가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게 아니라 그 믿음이 나를 가지는 상태가 된다.

자각 상태에 있다는 것은 아무런 판단없이 그저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가능한지 알아차린다는 뜻이다. 알아차리는 데에는 방어가 필요하지 않다. 알아차림 상태는 점점 더 커나갈 수 있고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으며, 그 결과 우리를 하나임의 상태에 더 가까워지게 해준다. 바로 여기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반면 믿음이란 우리가 믿는 것만을 허용하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제외해 버린다. 

분명히 말하건대  내 병을 낫게 한 것은 나의 믿음이 아니었다. 임사 체험은 순수한 알아차림의 상태였고, 전에 가졌던 모든 주의와 신조가 완전히 중지된 상태였다. 바로 이 상태가 내 몸을 스스로 '재건'하게 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낫기 위해서는 믿음을 완전히 버려야 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경험해 보았기에 치유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그저 믿고 내려놓기만 하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답은 보기보다 훨씬 간단하다. 그것은 아마 우리 시대에 가장 깊숙이 숨겨진 비밀인 것 같다. 답은 바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상사나 교사, 친구 같은 외부의 권위에 자기 힘을 내어준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 또한 자기 장엄함을 인식하게 못하게 막는 장애물이다. 감정은 영혼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복잡한 존재들이고, 자신의 느낌을 통제하려고 애쓴다.

오랫동안 오직 머리의 소리에만 의존해서 살다보면, 우리는 무한한 자아와의 연결을 잃어버리고, 그 결과 길을 잃었다고 느끼게 된다. 그저 '존재'하기보다 계속해서 뭔가를 '하는' 상태에 있을 때 이런 일이 발생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영혼의 목소리에 따라 사는 것, 허용의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이는 아무런 판단없이 자기 자신이 되도록 허용하는 것을 말한다. 존재함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순간에 머물면서 감정과 느낌을 따라 행동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 반면 '행위함'은 미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음은 특정 결과를 얻기 위해 우리를 여기저기로 데려가며 무슨 일인가를 계속해서 만들어 낸다. 지금 내 감정이 어떤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내 행동이 '행위함'에서 나오는지 '존재함'에서 나오는지 보려면 매일매일 결정을 내릴 때 어떤 감정이 뒤따르는지 보기만 하면 된다. 결정의 동기가 두려움인가, 아니면 열정인가? 내가 날마다 하는 모든 행동들이 삶에 대한 열정에서 나온 것이라면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 행동이 두려움의 결과라면 나는 '행위'하는 상태에 있다. 

 

시간은 매순간이 다 다르며, 각각의 순간은 한 번 지나고 나면 이 물리적 차원에서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다. 나는 이 사실에 편안해지는 법을 배우고, 순간에 사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될 수 있는대로 나는 이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어떤 감정적 짐도 옮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기보다는 매 순간을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깨끗한 백지로 보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바로 그 순간에 내 기분을 끌어올려주는 것, 가장 큰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을 한다. 

 

'암은 그저 표현되지 못했던 내 힘과 에너지일 뿐이야! 그 에너지가 바깥을 향하지 못하니, 내 몸에 맞서 안으로 향했던 거였어.' 그것은 암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낸 나의 생명력에 다름 아니었어요. 그 생명력이 아니타의 장엄하고 강력한 힘으로 표현되도록 내가 허용하지 않았던 거지요. 

 

강하게 고수하는 생각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 구체적인 믿음을 갖고 있으면 삶의 경험은 제한됩니다. 그것들이 나를 내가 아는 것에만 가두어두기 때문이지요. 이 세상에 대한 나의 지식도 나의 육체적 감각에 의해 제한을 받잖아요. 반대로, 불확실성을 편안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모든 가능성에 나를 열어놓는다는 것입니다. 불명료하기에 무한한 잠재성을 향해 활짝 열려 있을 수 있는 겁니다. 

확실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태도는 기대하지 않은 것을 향한 자신의 잠재성에 족쇄를 채우지요. '나는 모른다' 혹은 '어떤 일이 일어나나 한 번 보자'라고 느낄 때 내 확장된 자아는 아주 우연한 일치처럼 또는 정말 터무니없어 보이는 동시성의 형태로 어떤 대답이나 해결책을 가져다주기도 하지요. 불명료함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을 때 실제로 나는 가장 강력해집니다. 이전에 가졌던 모든 믿음과 불신, 신조와 교리를 놓아버릴 때 무한한 우주는 내가 뜻과 하나가 되며, 내 삶에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주기 위해 일하게 됩니다. 이것이 내가 내면으로부터 받은 가장 명료한 메시지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마법이 벌어집니다. 

 

 

나는 내 경험 덕분에 물리적 확실성이든 심리적 확실성이든 모든 게 확실하기를 바라는 욕구에서 놓여났을 때 느낌이 어떤지를 잠깐이나마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불명료함 속에서조차 완벽함을 느낄 수가 있었지요. 그런 차원의 정신적 해방감을 유지하는 것이 나에게는 진정한 자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즐겁에 지내는 것, 그리고 자신이나 삶을 너무 심각하게 대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새삼 더 강조할 필요조자 없다. 수많은 영적 전통들이 범하는 가장 큰 실수 가운데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삶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국내도서
저자 : 아니타 무르자니(Anita Moorjani) / 황근하역
출판 : 샨티 2012.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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