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의 경계선'을 답파하기
'최소한'을 요로 다케시 선생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바보의 벽'입니다. '평범함의 경계선'이지요. '무엇을 써두면 될까요?'라는 자포자기 질문이 나오는 것은 무슨 일 을 할 때 '합격 최저점의 성취'를 무의식적인 기준으로 채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은 '한판 승부'입니다.
'중요한 것'이 버젓이 있는데, '이러저러한 것'을 써봤자 헛일입니다. 지금껏 부실한 글로도 잘 통했던 사람은 금세 부실한 모드로 돌입합닏. 그런 사람은 부실하지 않은 글쓰기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니깐요.
'지하실 밑에 있는 지하실'과 '손이 닿지 않는 광맥'
작가가 할 일은 '지하실 밑에 있는 지하실'ㅇ 들어가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적어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렇게 서술합니다. '지하실 밑에 있는 지하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나름대로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 기술은 ;지면에 구멍을 뚫는 일'과 같은 육체 노동에 가깝다고 그는 말합니다.
끌을 마치로 내려쳐 바위를 부수고 구멍을 깊이 파지 않는다면 창작의 수원을 찾아낼 수 없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체력을 소진하고 몸을 혹사하는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한다. 작품을 쓰려고 할 때마다 새로 일일이 굴을 깊이 파야 한다. 그런 생활을 오랜 세월에 걸쳐 유지하다보면 새로운 수맥을 찾아내어 딱딱한 암반에 구멍을 뚫는 일을 기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꽤 효율적으로 해낼 수 있다.
'광맥과 만난다'는 것은 어떤 '문학적 전통'의 계승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글을 쓸 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다 쓰고 나서 몇 년, 몇 십년이 지나보니 '오호, 그 작품에는 '선배'가 있었구나!'하고 깨닫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 <기나긴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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