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타츠루, <곤란한 성숙>
상처에는 영원한 피가 흐른다 - 레비나스, <곤란한 자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죄형법은 복수의 권리 행사를 억제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지점에서는 무한책임을 멈추어야 하기 때문에 법률로 '그 이상으로 책임을 소급해서는 안 된다'는 한도를 정해 놓은 것이다.
어떤 일이든 한 번 일어나버린 일은 원상복구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해 인간이 충분한 보상을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동죄형법은 '책임지는 일의 불가능성'을 가르쳐준다.
이 곳을 주재하는 것은 나라는 서사
선수를 빼앗겼더라도 '후후, 이럴 줄 알았다'고 애써 딱 잘라 말한다. 자신이 이 곳을 주재해야 한다. 겉으로 보면 '선수를 빼앗긴'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까지 다 '내가 그린 그림'이었다고 간주해 버려야 한다.
선수를 빼앗기지 않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도 당황하지 않는 것이다. 예전부터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다.
공포, 불안, 후회 같은 감정은 몸과 마음의 능력을 높여 주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부정적인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억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곳을 주재하는 것은 나'라는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 내가 이 사건 전체의 프로듀서라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선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만약 선수를 빼앗겼더라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선수를 빼앗아가게 만들었다'는 서사에서 출발하는 것이 무도의 핵심이다. 이런 전제에서 출발하면 결정권은 제일 먼저 '나'에게 있게 된다. 책임과 결정은 맞바꾸기(barter) 관계이다. 책임을 지겠습니다라고 선언한 사람이 결정권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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