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루아의 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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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타츠루, <곤란한 성숙>


가볍게 여기는 인정이 없어졌다

현대에 들어서 거짓말의 특징은 내가 사용한 '금방'이라는 부사에 응축되어 있다. 변한 것은 거짓말의 내용이 아니라 거짓말과 시간의 관계이다.

데이비드 모러 David Maurer <사기꾼 입문>이라는 책에 따르면, 가장 훌륭한 사기(big con)은 영화 <스팅>에 나오는 것처럼 '피해자가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부정하게끔 꾸며진 것'이라고 한다. 


문제는 수명

사람들은 왜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하게 되었을까? '수명의 설정이 단축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가설이다. 예전에 사람들은 (주관적으로는) 좀 더 '크기가 크고 수명이 긴 생물'이었다. 친족공동체든, 지역공동체든, 학술공동체든, 정치결사든, 복수의 사람을 포함하고 복수의 세대를 가로지르는 '수명이 긴 생물'이었다. 개체로서 자기 자신은 언젠가 죽겠지만 앞선 사람을'계승해' 나중 사람에게 '물려주는' 공동체의 삶과 죽음은 개인의 생사와 관계가 없다. 만약 아이텐티이의 근거를 개인보다는 결합적 자아에 둔다면, 그 사람은 꽤 수명이 긴 생물로서 행동할 것이다. 

근대 이전에 비해 현대에 가장 변화한 점은 '주체'의 크기와 수명, 즉 일의 적절성 판단에 관여하는 도량형의 '기준' 자체이다. 현대인은 이미 '다세포 생물'을 주제의 거점으로 삼는 사고 습관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이 평균 수명이 지극히 짧은 생물로 행동하도록 강요받고 있기 때문에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계속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않는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여기저기 하고 다니며 시간을 낭비하기에 인생은 정말 짧다. 생명의 힘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없어지면 누구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어지는 말'만 선택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나와 똑같은 의견을 가진 인간이 얼마든지 있다'고 선언한 순간, 그 사람은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기 때문에 없어져도 아쉽지 않은 사람'이라는 범주 안에 자신을 넣어버린다. 


내가 쓰러지면

'내가 죽으면 나와 함께 사라지고 다른 누구도 재현할 수 없는 말'이란 어떤 말일까? 그것을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한다.한 줄 써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이 쓴 것을 다시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아,이것은 어딘가에서 읽은 것을 인용했구나.'

'이것은 누군가가 한 말을 그대로 베낀 것이구나.'

'이런 말을 하면 반응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쓴 말이구나.'

이렇게 점검하고 훑어보고 난 다음에도 남는 말이 있다면 그것이 '내가 아니면 누구도 대신하기 어려운 말', '내가 죽으면 나와 함께 사라질 말'이다. 그것만이 살아있는 동안 입에 담을 가치가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이해받을 수 있도록 인정과 도리를 다해야 한다. 논리적으로 어긋나지 않게 다듬고, 알기 쉬운 비유를 찾고, 근거가 되는 자료를 모으고, 읽기 쉬운 리듬과 귀에 거슬리지 않는 운율로 가다듬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라면 아무리 거칠게 표현해도 이해받을 수 있다. '낯선 이야기', '이제까지 누구한테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야기'는 웬만큼 성실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해받을 수 없다. 


내가 쓰러지면

하나의 직접성이 쓰러진다

서로 기대는 것이 싫었다

하나의 반항이 쓰러진다


청년도 역시 창조의 산물

나쓰메 소세키 <산시로>, <도련님>, <우미인초>

모리 오가이 <청년>, <무희>, <비타 섹슈얼리스>


청년의 특징은 '기동성'과 '가교성'에 있다.

구시대의 태내에서 자랐지만 신시대와 훌쩍 친숙해지기도 한 트릭스터(trickster)같은 존재


교육이란 '참견'과 '인내력'이다


교육의 수혜자는 '본인'이 아니다

교육의 수혜자는 본인이 아니다. 공동체 자체이다. 따라서 참견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다. 취미나 재미로 참견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가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러는 것이다. 자기가 사는 공동체가 살아남지 않으면 장래에 자기 자신도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견을 하는 것이다.

가르쳐야 하는 것은 개인이 살아남는 기술이 아니라 그들이 속해 있는 집단이 살아남기 위한 기술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내력은 아이들의 성장을 오래도록 기다려준다는 시간적인 인내력뿐만 아니라 자신이 미처 다 해내지 못한 일을 남이 해주었다라는 약간 분한 마음을 참는 힘도 포함됩니다.


분열되어 있는 것이야말로 교사


성숙이란 역할이다

성숙이란 콘텐츠가 아니다. 역할이다. 연령이나 성별이나 직업이나 경험과 별로 관계가 없다. 다소 잘하고 못하고는 있겠지만 캐스팅만 이루어지면 누구나 연기할 수 있다. 

어른이기 때문에 중재 역할을 맡는 것이 아닏. 입장에 의해 중재 역할을 맡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자크 라캉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알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 세워져 있는 동안은 언제나 충분히 알고 있다."


부모의 갈등을 아이가 중재할 때

'육아'란 '아이의 성숙을 지원하는 일'이다. 그리고 아이는 '조율이 안 되는 것을 조율시키는 일'에 스스로의 지성적, 감성적 노력을 집중하면서 성숙한다. 조율이 안되는 것을 조율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차이는 있지만 우선 이 점만은 일치한다는 공통의 플랫폼을 찾아야 한다.


부모의 육아 전략은 일치해서는 안된다

부모의 육아전략은 다르다. 다른 것이 당연하고, 다른 것이 더 좋다. 왜냐하면 아이가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평범하게 대하면 된다. 왜냐하면 육아는 7만년 전부터 해온 일이니깐. 친족의 존속은 인류의 최우선 과제이다. 뛰어나게 현명한 사람들이 필사적인 노력을 치르지 않으면 잘 해낼 수 없는 일이 아니다. 육아는 그런 제도로 설계되지 않았다. 그렇게 품질 관리의 수준을 높게 설정했다면 인류는 벌써 옛날에 소멸했을 것이다. 

인류학적으로 중요한 모든 제도는 '누구라도 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 


곤란한 성숙
국내도서
저자 : 우치다 다쓰루 / 김경원(KimKyoungwon)역
출판 : 바다출판사 2017.01.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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