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루아의 반서재


3. 확대가족론

소비자 마인드를 내면화한 아이들은 학습 노력을 최소화하는 것이 소비로서의 의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학습노력을 줄이면 줄일수록 졸업장을 위해 그들이 지불한 대가는 적어지게 될 것입니다. 학습 노력을 하나도 지불하지 않고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가장 현명한 소비자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 선생님들이 특별히 훌륭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옛날에는 선생님은 훌륭하다는 '판타지'에 대한 일종의 집단적 합의가 있었습니다. 단지 '선생님은 훌륭하다고 하자'고 서로 암묵적인 규칙을 갖고 있었을 뿐이지요.

인격 해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격 요소가 붕괴되고 공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잡한 맛'을 낼 수 없어요. 공격적인 성격과 내성적인 성격이 뒤섞여 인간적인 '깊은 맛'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장면이 바뀌면 갑자기 인격이 바뀌어 버립니다. 이런 극적인 '성격 교체' 현상은 어린 시절 술주정하는 사람 말고는 본 기억이 없습니다. 

우리가 눈 앞에 맞닥뜨리고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 '대답'인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가장 적절한 대응책입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해 온 일 중 무엇이 부적절했는지 찬찬히 살펴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거대한 배와 비슷합니다. 방향을 바꾸는데도 시간이 걸립니다. 

몸은 '도관' 같은 것입니다. 몸에 엄청난 양의 격류가 통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파이프의 직경을 크게 하고 파이프 강판을 튼튼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수련을 합니다. 하지만 파이프 직경을 크게 한다든가, 강판을 강하게 하는 것 자체가 연습의 목적이 아닙니다. 따라서 도장에서 수련생들이 절하는 상대는 선생님이 아닙니다. 선생님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거대한 자연의 힘, 야생의 힘에 감사를 표하는 것입니다. 

예절이라는 것은 초월자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자세입니다. 예의 바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따라서 무술을, 학교교육에서 예의를 가르치는 도구로 이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예의라는 것은 경외심과 두려움의 신체적인 표현이니까요. 외부에서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술이 기르고자 하는 것은 '살아가는 힘'이고 그 힘은 어디서나 잘 수 있는 능력이라든가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능력이라든가 세포의 빠른 재생 능력 같은 종류의 힘입니다. 그러한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칸트의 경우로 유추해 보면, 어제와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를 통과하면서 '분명 어제와 똑같은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데 왠지 어제와는 기분이 약간 다르다' 싶을 때가 있었을 겁니다. 그 느낌이 하나의 실마리가 됩니다. 그럴 때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탄생하는 것이죠. 새로운 아이디어의 실마리를 놓치지 않고 파악하려면 날마다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것입니다. 종교적인 수행도 무술에서의 수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반복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것이죠. 아이가 극적으로 변화해야할 시기에는 그야말로 제대로 틀이 갖추어진, 의례적이고 정형적인 자리에 자신을 놓아두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마도 조용하고 안정적이고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일 것입니다. 이런 조건이 확보되지 못하면 몸도 마음도 성장하지 못합니다. 


어른 없는 사회
국내도서
저자 : 우치다 타쓰루 / 김경옥역
출판 : 민들레 201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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