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위기의 순간에 그 시험을 통과하거나 고민만 해결하면 모든 문제가 끝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세상에 진정으로해결되는 일은 없다. 세상만물은 모였다가 다시 흩어질 뿐이다. 그리고 또 다시 모였다가, 또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진정한 치유란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을 여유있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내면에 넉넉한 빈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한계 상황에 내몰렸을 때 그 지점을 온전히 이해해보라. 다시 말해 지나치게 매몰되지 말고 억누르지 말라. 그러면 내면에 있던 단단한 뭔가가 녹을 것이다. 분노의 에너지든 실망의 에너지든 두려움의 에너지든 어떤 것이 일어날 때 그 순순한 힘 때문에 우리는 부드러워진다. 그 에너지가 한쪽 방향으로만 굳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가슴으로 파고들어와 우리를 열어젖힌다. 바로 그 순간 무아를 발견하게 된다. 그때 우리가 늘 쓰던 계책은 무너진다.
훗날 초감 트롱파는 날숨이 중요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이 날숨을 쉴 때, 마음이 쉬는 상태인 열린 마음에 가장 근접해지며, 날숨을 쉰 다음 돌아갈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도 수행법의 원리에도 맞는다.
생각은 그게 무엇이든 마음을 스쳐 지나간다. 따라서 명상을 하려고 앉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든 생각이 다 일어나도록 허용하며 자리를 내주겠다는 태도다. 명상은 생각이란 생각은 모조리 일어나도록 멍석을 깔아주는 일이다. 따라서 명상을 할 때 어떤 생각이 떠올라 마음을 뺏긴다면, 그 생각이 좋든 싫든 개의치말고 "생각"이라고 불러라. 열린 마음과 자비심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보라. 그런 다음에는 마치 하늘에 풍선을 날려보내듯 그 생각을 그대로 흘러보내라.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조건없는 친절함'으로 알아차리고 '생각'이라고 이름을 붙인 다음 다시 놓아버리면 된다. 생각이 계속 반복돼도 마찬가지다.
명상은 가슴을 뛰게 하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아니다. 그저 매일 시간을 내서 잠자코 자리에 앉아 나를 마주하는 지루한 일과일 뿐이다. 명상은 이렇게 지겨움과 초조함, 두려움, 행복 등을 겪으면서, 무엇을 경험하든 계속 날숨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렇게 끈기를 가지고 반복할 때, 세상 일을 초연하게 바라보는 담담한 마음가짐과 너그러움, 유머 감각, 진실성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명상이 주는 대가다.
무슨 일이 생기든 그것을 호기심으로 대하고 무심하게 넘겨버려라. 혼란스러운 에너지와 힘겨루기를 하는 대신, 혼란을 기꺼이 맞이하고 예사롭게 다루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친구는 괴물에 대한 궁금증을 결코 잊지 않았다. 무작정 도망치기를 멈추고 괴물들 쪽으로 몸을 돌린 것이다. 그날 이후 친구는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았다.
나는 삶에 대한 불필요한 저항을 없애려면, 삶과 얼굴을 맞대고 정면으로 부딪쳐보라고 말한다. 어떤 일이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를 거두는게 자신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해치지 않음의 기본은 깨어있는 마음이다. 두 번째 단계는 자제심이다. 이는 갑갑하고 따분한 순간이 와도 다른 기분 전환거리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는 것이다. 어떤 공백이 생길 때 그것을 금세 다른 것으로 채우지 않는 것이 수행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도 그것을 즉시 메우려고 하지마라. 그냥 잠시 멈춰서 고요하게 기다려라. 이것이야말로 삶을 전환시켜주는 경험이다. 이렇게 인생에 여백과 빈 공간을 마련해갈 때 우리에게는 여유가 깃든다. 이런 기다림을 통해 삶의 근원적인 무한함과 무상함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을 더 철저히 알게 되며, 있는 그대로 존중하게 된다. 또한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지레 겁먹지 않는다.
우리가 누군가를 마음으로도 해치지 않으려면 항시 깨어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자기의 말과 행동을 스스로 알아차릴 만큼 속도를 늦춘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감정의 연쇄 반응을 더 많이 알아차리고,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더 많이 이해할수록 자제하기는 훨씬 쉽다. 일상 생활 속에서 깨어 있고, 속도를 늦추며, 알아차리는 것은 그대로 삶의 방식이 된다.
해치는 마음을 일으키는 뿌리는 무지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명상을 하는 까닭도 이 무지함을 녹여내기 위해서다. 우리가 마음챙김을 하지 못하고, 자제하지도 못하며, 전체적으로 균형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것은 혼란이 아니라 우리가 명료해지는 출발점에 선 것이다.
티베트말에 '예탕체 Ye Tang Che'라는 단어가 있다. '예'는 '통틀어서' 또는 '완전히'를 의미하며, '탕체'는 '지친' 혹은 '소진된'을 뜻한다. 결국 이 두 낱말을 합친 예탕체는 '완전히 지쳐버린' 혹은 '완전히 질려서 나자빠진'이라는 의미다. 이 단어는 모든 희망을 포기했을 때 찾아오는 완전한 절망의 순간을 가리킨다.
영원한 안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배우는게 있다. 해보지 않으면 '영원한 안전'이 왜 불가능한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기댈 뭔가를 찾은 사람의 삶은 더욱 불편하다. 어쩌면 유신론은 중독과 다름없다. 온갖 의심과 의문들이 저절로 사라질 거라는 희망에 중독된 상태다. 어딘가에 기댈 안전한 장소가 있다는 신념으로, 맹렬하게 질주하는 중독자들이 많은 사회는 자비로운 곳이 아니다.
희망과 두려움은 자기에게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 즉 결핍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뭔가를 채워 넣으려고 한다. 이런 믿음 속에서는 스스로를 결코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끊임없이 희망에 집착할 수 밖에 없고, 그 희망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지금 이 순간을 앗아간다.
뭔가에 매달리고 집착할 때 그 뿌리는 희망이다. 절망은 어디에도 매달리거나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다. 절망이야말로 수행의 기초다. 절망에서 출발해야만 우리는 노력하면 안전하리라는 헛된 희망을 품지 않는다.
우리 앞에는 오만 가지 사건이 줄을 잇고, 수많은 사물과 사람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는 어차피 벌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반응은 어떤가? 특정한 경험만 남기려고 집착하고, 그 외에는 거부하거나 피하려고 늘 전전긍긍하지 않는가. 그것이 바로 부처가 말한 '팔세간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증거다. 역설적으로 그런 '팔세간법'을 만들어 우리는 얽매이는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경험하는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이 팔세간법을 내면에 무의식적으로 만든다.
자비를 실천하기가 까다로운 이유는 외부에 있는 존재를 거부하는 일이 내 안에 있는 스스로를 거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면에서 스스로를 거부했기 때문에 우리는 외부적인 경험이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이 옳거나 그르다고 느낄때 그 사실에 쉽게 집착한다. 결국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이 마음의 문을 닫고, 내 세계를 옹졸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을 옳거나 그르게 만들지 마라. 내 안에 옳고 그름을 채우지도 마라. 대신 거기에서 벗어난 중도의 길을 따르라. 중도에 머무를 줄 아는 자는 옳고 그르다고 말할 때, 자신의 견해가 스스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함은 아닌지 열린 마음으로 되돌아볼 줄 안다.
결국 보리심만이 고난을 치유한다. 내게 힘이 됐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결국 포기해야할 순간, 고통 그 자체에서 연민이나 우러나 우리는 치유된다. 이때야말로 진정한 보리심이 나온다. 보리심은 백만년간 땅에 파묻혀도 빛이 바래거나 훼손되지 않는 다이아몬드 같다. 이 고귀한 마음은 내가 아무리 욕을 하고 고함을 질러도 흔들리지 않는다. 다이아몬드가 그렇듯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며, 아무일 없다는 듯 찬란하게 빛난다. 내가 아무리 무자비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워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보리심은 결코 잃어버리거나 훼손되지 않는다.
인내는 이를 악물고 참는게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습관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며 열린 마음으로 씹고, 냄새맡고 바라보면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인내의 반대는 공격성이다. 그것은 벌떡 일어나 움직이려는 욕구, 자신을 어디로든 몰아붙여 의식의 빈 공백을 얼른 메우려는 욕구다. 인내의 여정은 마음을 내려놓고, 모든 경험을 향애 마음을 열며, 삶의 경이로움을 체험하는 것이다.
견해들은 모두 견해에 불과하다. 어느 것도 진실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견해에 감정적인 에너지까지 쏟아 부으며 그것을 뒷받침하려고 노력한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대한 희망은 버려야 한다. 유명한 인디언 주술사인 돈 후앙은 자신의 제자인 인류학자 카를로스 카스타네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양 최선을 다하되, 동시에 그런 일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이것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가르침으로 얻은 영감을 현실을 통해 실천할 때 직면하는 딜레마일 뿐이다
<밀라레파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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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제시하는 수행은 한 치의 게으름도 허용하지 않는다 아직 시간이 많으니 나중에 해도 충분하다는 생각이야말로 최고의 미신이자, 최대의 장애이며, 최악의 독이다. '나중에 하면 된다'는 식의 사고는, 지금 이 순간에서 도망치려는 뿌리 깊은 습성과 힘을 합쳐 우리의 인식과 생각까지도 흐려놓는다.
금강승불교(vajrayana)는 번개(vajra)의 수레(yana)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번뇌를 단숨에 귾는 깨달음의 번개를 가리킨다.
우리는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리기 전에는 세상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다. 삼매야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도망갈 곳을 미리 준비해놓지도 않는다. 대안을 구하지 않고 나중에 하면 된다며 미루지도 않는다.
수행의 핵심은 습관을 고치는 일이다. 특히 마음이 습관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살면서 부딪히는 상황에 대해 예전과 똑같이 낡고 해묵고 뻔한 습관적인 반응으로 일관한다. 그래서 우리는 감옥과 같은 갑갑한 인생을 산다.
<옮긴이의 말>
우리가 어떤 일을 필요 이상으로 하는 까닭은 그것을 통해 현실도피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상이라는 실체와 맞서기 위해, '나는 ~ 한 사람'이란 지속적인 자아상을 추구하는 모든 행위 일체가 현실도피다.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배웠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고무된 그 마음을 가지고 초발심을 내거나, 수행의 길을 더욱 굳세게 나아가기 위해 신발끈을 한 번 더 조이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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