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예언은 시커먼 물처럼 언제나 거기 있다.
2014. 5. 13.예언은 시커먼 물처럼 언제나 거기 있다. 평소에는 어딘지 모르는 장소에 몰래 숨어있다. 그러나 어떤 때가 되면 소리가 없이 넘쳐흘러, 내 세포 하나하나를 차디차게 적시고, 너는 범람하는 그 잔혹한 물속에 빠져 허덕이게 된다. 너는 천장에 있는 공기구멍에 매달려서, 밤의 신선한 공기를 필사적으로 들이마신다. 그러나 거기에서 빨아들이는 공기는 바짝 메말라 있어서 네 목구멍을 뜨겁게 태운다. 물과 갈증, 차가움과 뜨거움이라는 대립적인 요소가 힘을 합쳐서 동시에 너에게 덤벼든다. 세계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는데도, 너를 받아줄 공간은 - 그건 아주 조그만 공간이면 되는데 - 어디에도 없다. 내가 목소리를 구할 때 거기 있는 것은 깊은 침묵이다. 그러나 네가 침묵을 구할 때 거기에는 끊임없는 예언의 소리가 있다..
상상하는 러시아인은 반드시 파멸하게 마련이지 (태엽감는 새 중에서)
2013. 8. 24.우리의 레닌 동지는 마르크스의 이론 중에서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 편리하게 뽑아냈고, 우리의 스탈린 동지는 레닌의 이론 중에서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 그건 몹시 적은 양이었지만 — 편리하게 뽑아냈지. 그리고 이 나라에서는 말이야, 이해할 수 있는 범위가 좁을수록 좋은거야. 알겠나, 마미야 중위, 이 나라에서 살아남는 수단은 하나밖에 없네. 그건 무슨 일이든 상상하지 않는 거야. 상상하는 러시아인은 반드시 파멸하게 마련이지. 물론 나는 상상 같은 건 안하네. 내 일은 다른 사람들이 상상하게 만드는 거네. 그게 내 밥벌이 수단이지.그것만큼은 자네도 잘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걸세. 적어도 여기 있는 동안만은 무언가를 상상하고 싶어지면 내 얼굴을 떠올리라고. 떠올리면서, 이러면 안 되지, 상상하는..
아저씨는 '외부'에서 만들어진 거에요 (태엽감는 새 중에서)
2013. 8. 24.지금 말한 것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해요. 자 지금부터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라든지자 지금부터 새로운 자신을 만들자라는 것 말이에요. 스스로는 잘했다, 새로운 자신이 되었다 하고 생각해도그 껍질 밑에는 원래의 아저씨가 있는 거고무슨 일이 있으면 그것이 안녕하세요 하고 얼굴을 내미는 거에요. 아저씨는 '외부'에서 만들어진 거에요.그리고 자신을 바꾸겠다는 생각 또한 외부에서 만들어진거죠.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히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깐 지금 그것에게 보복당하는 것인지도 몰라요.여러가지 것으로부터...예를 들면 아저씨가 버리려고 했던 세상으로부터그리고 버리려고 생각했던 아저씨 자신으로부터 (중략) 나라고 하는 인간은 결국 어딘가 외부에서 만들어진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외부에서 와..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by 무라카미 하루키
2013. 5. 14.Truman Capote pose by katieeosgood 지루한 대화는 때로 고문에 가깝다. 아무리 유창해도 의미가 불분명하거나 무미건조하면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다. 내 영어는 유창하지는 않지만, 의견만은 팔아도 될 정도로 많이 갖고 있다보니 상대는 나름대로 귀를 기울여주는 것 같다. 분명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지식을 찾고자 하는 마음과 의욕일 터, 그런 것이 있는 한, 우리는 자신이 자신의 등을 밀어주듯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이 먹는 것을 여러가지를 잃어가는 과정으로 보는가, 혹은 여러 가지를 쌓아가는 것으로 보는가에 따라 인생의 퀄리티는 한결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
어둠의 저편 by 무라카미 하루키
2013. 4. 5.A notte fonda il tempo scorre a modo suo. Andare controcorrente non serve a nulla. by FranArtPhotography "인간이란 결국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그 기억이 현실적으로 중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상관이 없지. 단지 연료일 뿐이야. 신문의 광고 전단지나 철학책이나 에로틱한 잡지화보나 만엔짜리 지페 다발이나 불에 태울 때면 모두 똑같은 종이조각일 뿐이지. 불이 '오, 이건 칸트로군' 이라든가 '이건 요미우리 신문의 석간이군' 이라든가 또는 '야, 이 여자 젖통 하나 멋있네' 라든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타고 있는 건 아니잖아. 불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어떤 것이든 모두 종잇조각에 불..
형이상학적인 여자 - 1963/1982년의 이파네마 아가씨 by 무라카미 하루키
2013. 4. 4.A sunny saturday on Ipanema Beach by Xavier Donat girl from ipanema by Chewy Chua "그런데" 하고 나는 말을 꺼낸다. "확실히 1963년에도 아가씨를 보았어요.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꽤 오래된 이야기 아녜요?" 하고 말하며 그녀는 약간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래요. 확실히 꽤 오래된 이야기예요." 그녀는 단숨에 맥주를 절반쯤 마시고, 캔에 뻥 뚫린 구멍을 바라본다. 그것은 보통의 캔 맥주 구멍이다. 하지만 그녀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게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온 세계가 그리로 쑥 들어가 버릴 것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만났을지도 몰라요. 1963년이죠? 1963년……. 그래, 만났을지도 몰라요." "아가씨는 나이를 먹..
"호텔 이름을 왜 '알파빌' 이라고 했어요?" - 어둠의 저편 by 무라카미 하루키
2013. 4. 4."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요" 라고 마리가 묻는다. "호텔 이름을 왜 '알파빌' 이라고 했어요?" "글쎄, 왜 그렇게 지었을까. 아마 우리 사장님이 지었을걸. 러브호텔 이름 같은 건, 뭐 아무 거나 되는 대로 갖다붙이지 않았을까. 결국은 남자와 여자가 그걸 하러 오는 곳이니까 말이야. 침대와 욕실만 있으면 오케이지. 이름 같은 거야 아무도 신경 안쓰잖아. 대충 러브호텔에 걸맞는 그럴싸한 이름만 하나 붙어 있음 되는 거지. 근데, 그런 건 왜 묻는 거야?" "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하나라서. 장 뤽 고다르의 작품이죠." "그런 건 들은 적 없는데." "꽤 오래된 프랑스 영화예요. 1960년대의." "그럼, 거기서 따온 이름인지도 모르겠네. 사장님한테 물어봐야지. 그래서, 그게 무슨 의미야, 알파빌..
<태엽감는 새>부터 <해변의 카프카>까지 (3)
2013. 3. 8.A Girl in Shadow by alubavin 15세의 주인공에 대하여 (2) 주인공을 15세 소년으로 설정함으로 당연히 문체도 달라집니다. 이를테면 15세 소년은 그다지 훌륭한 비유를 쓰지는 못해요.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궁지라고도 할 만한 데서 빠듯하게 살고 있으니까, 문체도 따라서 크리스프(crisp)해지지요. 이야기를 유효하게 서바이브(survive)하기 위한 문장으로 되어 가는 거에요. 안 그럴 수가 없어요. 정교한 레토릭도 필요가 없게 되지요. 물론 문장은 꽤 주의 깊게 고쳐 썼는데 고치면 고칠수록 심플(simple)해지더군요. 그런 점이 지금까지의 제 문체와 다른 것으로 나타났을 지도 몰라요. 제가 특히 신경을 쓴 것은 15세 소년이 나온다고 해서 계몽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
<태엽감는 새>부터 <해변의 카프카>까지 (1)
2013. 3. 7.傳說中的泡泡襪女高生 by 回不去的都叫過去 by *嘟嘟嘟* 부터 까지 Q. 는 이래의 긴 소설이군요. 를 다 썼을 때, 아무튼 자신 속에 있었던 소설적인 것을 all out로 다 내버린 느낌이었어요. 4년쯤이나 들여서 계속 긴 이야기를 쓰고 있었으니까요. 4년은 길었다. 그 동안 계속 미국에 살았거든요. 녹초가 되어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 후에 몇 개인가 단편 소설은 썼지만 장편 소설을 쓰려는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어요. 그 다음에 를 쓰게 되는데, 는 논 픽션이랄까, 요컨대 받아쓰기이니까, 타인의 이야기를 채집하는 작업인 거에요. 척척 들이쉬어 가는 작업 말이지요. 그에 대해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때까지 담아둔 것을 내뺕는 작업이에요. 그런 의미에서는 정반대의 일을 하고 있었던 셈이에요. 1년간..
모래폭풍/질이 높은 치밀한 불완전함 - 해변의 카프카(상) by 무라카미 하루키
2013. 3. 4.'Kafka on the Shore' on the shore by ArkanGL 모래폭풍어떤 경우에는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진로를 바꿔가는 국지적인 모래폭풍과 비슷하지. 너는 그 폭풍을 피하려고 도망치는 방향을 바꾼다. 그러면 폭풍도 네 도주로에 맞추듯 방향을 바꾸지. 너는 다시 또 모래폭풍을 피하려고 네 도주로에 맞추듯 방향을 바꾸지. 그러면 폭풍도 다시 네가 도망치는 방향으로 또 방향을 바꾸어 버리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치 날이 새기 전에 죽음의 신과 얼싸안고 불길한 춤을 추듯 그런 일이 되풀이되는 거야. 왜냐하면 그 폭풍은 어딘가 먼 곳에서 찾아온, 너와 아무 관계가 없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 폭풍은 그러니깐 너 자신인 거야. 네 안에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니..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밸런스 시트 - 풀사이드 by 무라카미 하루키
2013. 2. 16.생일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그는 7시에 깨어나서는 물을 끓이고 뜨거운 커피를 타고 서양 상추와 오이로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다. 드물게도 아내는 아직 푹 자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그는 음악을 들으며 수영부 시절에 단련된 꽤 힘든 체조를 15분 동안 열심히 했다. 미지근한 물에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수염을 깎는다. 그리고 긴 시간을 들여 정성스레 이를 닦는다. 치약은 조금 짜서 이빨 하나하나의 앞과 뒤에 천천히 칫솔질을 한다. 이빨 사이의 더러운 것은 덴탈 플러스를 사용한다. 세면장에는 그의 것만 세 종류의 칫솔이 놓여 있다. 특정한 자국이 안 생기도록 로테이션을 하면서 한 번씩 나누어 쓰는 것이다. 그런 아침 의식을 대강 마치고 나서 그는 언제나처럼 근처에 산책은 가지 않고 탈의실 벽에 붙은 키..
인생의 반환점 - 풀사이드 by 무라카미 하루키
2013. 2. 16.35세가 되던 봄, 그는 자신이 이미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버린 것을 확인했다. 아니,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35세의 봄을 계기로 그는 인생의 반환점을 돌기로 결심했다고 하는 것이 적합하리라. 물론 자신의 인생이 몇 년간이나 계속 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만약 78세까지 산다고 한다면 그의 인생의 반환점은 39세가 되는 셈이고 39세가 되려면 아직 4년의 여유가 있다. 게다가 일본 남성의 평균 수명과 그 자신의 건강 상태를 함께 생각한다면 78년의 수명은 그다지 낙천적인 가설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35세의 생일을 자기 인생의 반환점으로 정하는 것에 대해 조금의 망설임도 가지지 않았다.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면 죽음을 조금씩 멀리 물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을 계속하다..
나쁜 일이 일어나면 그때 가서 생각하도록 하면 돼 - 패밀리 어페어 by 무라카미 하루키
2013. 2. 16."좀 혼란스러워. 생활의 변화 따위에 대해서 말이야. 기압의 변화와 마찬가지야. 나도 내 나름대로 얼마만큼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거야." 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오빠한테 대들어서요?" "다들 누군가에게 대들고 있어. 하지만 만약 네가 그 중에서 나를 뽑아 대들고 있다면, 그 선택은 잘못되지 않았어. 그러니까 신경 쓸 거 없다구." "때때로 어쩐지 굉장히 무서워요. 앞날의 일들이." "좋은 면만 보고 좋은 일만을 생각하도록 해. 그럼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나쁜 일이 일어나면 그때 가서 생각하도록 하면 돼." 하고 나는, 와타나베 노보루에게 한 말과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 패밀리 어페어 by 무라카미 하루키 산다는 거 그리 심각할 필요 없지 않은가.자신에 대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중요성을 ..
무라카미 하루키1Q84 일러스트 외 1Q84 illustration by Murakami Haruki
2012. 12. 22.http://ralunaticum.tumblr.com http://thebookvineyard.wordpress.com/2012/02/22/murakami-we-meet-again/ http://www.tumblr.com/tagged/aomame http://lanlanlanban.tumblr.com http://nescencianecat.wordpress.com/2011/03/05/1q84-la-obra-mas-ambiciosa-de-haruki-murakami/ http://www.haruki-murakami.com/post/23411302993/aomame-1q84 1Q84 전3권 패키지 세트국내도서>소설저자 : 출판 : 문학동네 2009.08.25상세보기
회전목마의 데드히트 回転木馬のデッド・ヒート
2012. 9. 2.회전목마의 데드히트 (양장)국내도서>소설저자 : 무라카미 하루키(Haruki Murakami) / 권남희역출판 : 문학동네 2010.09.10상세보기 데드 히트 dead hit : 경마 따위에서, 둘 이상이 같은 시간에 결승점에 닿아 우열을 가릴 수 없는일 1. 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의 생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의 일종의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앙금이란 그 무력감을 말한다. 우리가 아무 데도 갈 수 없다는 건 이러한 무력감의 본질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집어넣을 수 있는 인생이라는 운행 시스템을 소유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시스템은 우리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 그건은 회전목마와 비슷하다. 그것은 정해진 장소를 정해진 속도로 돌고 있을 뿐이다. 아무 데도 ..
달리고 나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느냐가 장거리 러너의 중요한 기준
2012. 8. 10.1. 지금까지 여러번 내 손길을 거쳐간 책. 이외에도 여러 권의 달리기 관련 책을 읽어왔다. 각각 손이 가는 때가 있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을 때, 재충전이 필요할 때 하루키의 이 책을 다시금 집어들게 된다. 지금까지는 주로 서울, 경기권에서만 달려봤지만 - 2009년에 시작한 달리기, 그래봤자 풀코스 6번 완주에 불과하지만 - 내 맘 한켠에는 각지에서 달려보고픈 욕망이 있다. 국내를 포함해서 여러 코스를 섭렵해보고픈 소망은 모든 달림이의 바램일 것이다. 사진으로라도 대리만족을 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2. 어떤 일이라도 반복하다 보면 일종의 철학이 생긴다. 하루키도 마찬가지고, 조지 쉬언의 책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나도 그렇지만 건강을 위해 달리는 건 아니다. 만약 건강이 주어진다면 그..